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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랍에미리트(UAE) 아부다비와 스위스 제네바에서 세 차례에 걸친 미-러-우크라 3자 평화협상이 끝난 뒤 나온 평가는 한마디로 러-우크라가 '진지하게 열심히 하는 척 한다'는 것이다. 영토 양보 여부와 전후 안보보장 문제를 둘러싼 당자자간의 이견이 워낙 커 단 한 발자국도 전진하지 못하고 있지만, 겉으로는 일체 티를 내지 않고 열심히 하는 척 '연극한다'는 의미다.
미국의 유력 경제지 월스트리트저널(WSJ)은 19일(현지시간) 러-우크라는 트럼프 미 대통령이 화내지 않도록 눈치를 보며 3자 협상에 임하지만, 실질적인 진전은 없다고 분석했다. 나아가 "어려웠지만 비즈니스적“(메딘스키 러시아 대표단장) "실질적인 회담"(우메로프 우크라 대표단장)과 같은 발언은 '정치적 연극'으로 전락한 평화 협상의 교착상태를 덮어주는 외교적 수사라고 꼬집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의 전쟁 종식 노력 실패에 대한 비난을 피하기 위한 게임”(이보 달더 전 나토 주재 미 대사) "트럼프 대통령에게 보여주는 연극"(우크라이나 고위 당국자)이라는 논평을 소개하기도 했다.
로이터 통신도 "유럽 5개국 정보기관 수장들이 올해 러-우크라 간의 평화 달성 가능성에 대해 회의적"이라며 "정보기관의 한 소식통은 제네바 협상을 '연극'으로 불렀다"고 보도했다.

우크라이나 평화 협상이 실질적인 성과를 거두려면, 미-러-우크라 중 누군가가 통 크게 양보를 해야 한다. 하지만, 아직까지는 그럴 징후가 보이지 않는다. 손쉽게 합의가 가능한 포로교환과 같은 사소한 문제에 매달려 협상의 성과라고 내놓는 수준이다. 아부다비에서 열린 2차 협상에서 러-우크라 간에 포로교환이 성사된 게 대표적이다.
모든 협상이 대체로 그렇지만, 진전을 막는 것은 상대에게 먼저 양보할 것을 우기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군의 도네츠크주(州) 철군을 뜻하는 영토 문제 논의에서 미-러 측은 '선(先) 도네츠크주 철군, 후(後) 안보보장 확정 및 선거'를, 우크라 측은 '선(先)휴전과 안보보장 확정 및 선거, 후(後) 도네츠크주 철군'을 내세우며 팽팽하게 대치 중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제네바 3자 협상(2월 17, 18일)이 끝난 뒤인 19일 언론 인터뷰에서 미-러를 향해 평화 협정의 승인을 위한 국민투표와 총선(대선)을 실시할 수 있도록 2개월 간의 휴전을 거듭 요구했다. 그는 "만약 휴전이 최소 두 달 동안 지속되면, 이 기간에 (도네츠크주 양보 등을 포함한 평화 합의안에 대한) 국민투표 등 선거가 가능하고, 통과된다면 협상 타결을 위해 모든 노력을 다하겠다"며 "미국도 러시아가 휴전에 응하도록 설득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2달간의 휴전을 여전히 협상 타결의 전제조건으로 내세웠다.
하지만, 러시아는 협상 타결과 함께 우크라이나군이 돈바스에서 철수해야 하며, 그 후에야 휴전, 선거 및 국민투표가 가능하다고 맞서고 있는 상태다. 트럼프 미 대통령 역시 러시아의 편을 들고 있다. 평화안에 대한 우크라이나 국민투표의 결과를 섣불리 예측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이유로 보인다. 우크라이나의 현재 분위기로는 국민투표의 결과는 대체로 부정적이다. 오랜 전쟁에 지친 우크라이나 국민이 어떤 평화안이든 받아들일 수 있다는 확신이 설 때까지 미국은 우크라이나 제안을 수락하기는 쉽지 않다. 국민투표에서 부결은 지금까지의 모든 협상 과정을 원점으로 되돌리기 때문이다. 미국은 우크라이나가 평화안에 서명할 때까지 우크라이나에 대한 안보 보장을 제공하지 않겠다는 카드로 젤렌스키 대통령을 얼르고 달래는 중이다. 누가 봐도 이 상태로는 결론이 나기 힘들다.
미-러-우크라 3개국 중 입지가 가장 취약한 젤렌스키 대통령이 끝까지 버티고 있는 것은, 유럽의 지지에 마지막 기대를 걸고 있기 때문이다. 여러 정황으로 볼 때 유럽은 3자 협상에 대한 강경한 입장을 굽히지 않고 있다.

공교롭게도 제네바 3자 협상이 끝난 뒤 유럽연합(EU)의 대(對)러 요구 사항이 언론에 공개됐다. 카야 칼라스 EU 외교부문 고위대표가 회원국들에게 배포한 초안이다. 러시아군의 감축과 우크라이나 등 CIS 주둔군 철수를 비롯해 대외 사이버 공격, 선거 개입, 허위 정보 유포를 중단할 것으로 요구했다. 또 (우크라이나) 전쟁 범죄 조사와 국제 조사관의 접근, 국제법에 대한 러시아 국내법 우선 조항 폐지, 우크라이나에 대한 배상금 지급은 물론, 자유 선거, 정치범 석방, 언론 자유 보장, 야당 인사인 나발니와 넴초프 전부총리의 피살 사건 수사 협력 등 민주적 개혁 조치도 요구 조건으로 내놨다.
이 초안은 23일 브뤼셀에서 열리는 EU 외무장관 회의에서 논의될 예정이다. 러시아 일각에서는 나폴레옹도 히틀러도 점령하지 못한 러시아를, 칼라스 외교 대표가 하겠다는 망상을 갖고 있다는 반응(원래 그녀를 나폴레옹, 히틀러로 비유한 이는 오르반 헝가리 총리다/편집자)이 나온다.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칼라스 시대가 유럽 외교의 황금기는 아니다"는 말로 그녀를 무시했다. 칼라스 외교 고위 대표의 행보에는 메르츠 독일 총리와 같은 대(對)러 강경파가 뒤를 받치고 있다. 메르츠 총리는 한 인터뷰에서 "현재 진행 중인 평화 협상을 믿을 수 없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성과 인도주의적 논리로 푸틴 (대통령)을 설득할 수 없기 때문에 어느 한쪽이 완전히 지쳐 쓰러질 때 끝날 것"이라고 전망했다. 그러면서 젤렌스키 대통령의 양보를 설득하는 트럼프 대통령의 카드인 "우크라이나의 EU 조기 가입에 반대한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트럼프 대통령을 거의 무시하다시피 하고 자신의 요구 조건을 내건 건 유럽 '전쟁 강경파'의 영향을 받은 탓으로 보인다고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지적했다.
러시아도 결코 서두르지 않고 있다는 게 미국 정보및 군사 전문가들의 견해다. 미국 일간 뉴욕 타임스(NYT)는 푸틴 대통령이 평화 협상의 결과와는 상관없이 도네츠크주 완전 점령을 위해 2년 더 싸울 작정을 하고 있다는 군사 전문가들의 판단을 전했다. 푸틴 대통령은 도네츠크 지역을 완전히 해방하는 데 앞으로 18개월에서 2년이 걸리더라도 현재의 군사 작전이 모스크바에 더 큰 협상력을 제공하고 있다고 믿고 있다는 주장이다. 아이러니하게도 급한 쪽은 정치 외교적 위상이 가장 높은 미국이다. 오는 3월, 6월 등으로 전쟁 종식의 목표를 제시할 정도로 트럼프 미 대통령은 협상 타결을 간절히 바라고 있다. 11월로 예정된 미 중간선거 때문이다. 선거의 승패가 우크라이나 평화 협상 결과에 달려 있다는 건 누구에게나 자명하다.
미국이 러-우크라 양측의 분위기를 살피며 협상 테이블에서 우크라이나군의 철군 지역(도네츠크주)을 비무장 자유경제구역으로 전환하는 방안을 지속적으로 내놓은 이유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미국 NYT는 제네바 3자 협상에서 러-우크라 군대가 모두 주둔하지 않는 돈바스 비무장지대의 설치 방안이 논의되고 있다고 18일 보도했다. NYT는 "트럼프 미 대통령이 지난해 11월 제시한 28개항 평화 계획안에 포함된 방안을 되살리는 것"이라면서 "그러나 양국 군대 사이에 낀 지역에 자유무역지대를 조성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어렵다는 점도 지적됐다"고 밝혔다. 당초 28개 항 평화안에 따르면 돈바스 지역에 비무장지대를 설치하되 행정 통제권은 러시아 민간 당국에 넘기기로 했다. 당연히 우크라이나는 이 계획에 반대했다.

NYT에 따르면 제네바 협상에서 러-우크라 양국 대표가 참여하는 민간 행정 통제 기구의 설립이 논의됐다. 하지만 합의에는 이르지 못했다고 한다.
영토 문제의 해결로 가는 중간 다리 격인 이 대목에서도 이처럼 러-우크라 간 합의가 쉽지 않는 게 평화 협상의 현실이다. 하긴, 이보다 더 쉽고 간단한 이슈인 자포로제(자포리자) 원전 통제권에 대한 이견도 아직 해소하지 못했다. 미국의 28개 항 평화 계획에는 미-러-우크라가 자포로제 원전을 공동관리하는 조항이 포함돼 있는데,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를 거부하고 원전을 우크라이나로 넘기라고 요구한다. 모스크바는 당연히 이를 거부한다.
제네바 3자 협상의 내용을 보고 받은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전보다 더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선 듯한 느낌이다. 그는 미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와의 인터뷰에서 러-우크라 양국이 서로 같은 거리 만큼 군대를 물려 비무장지대화하는 절충안을 제시하기도 했는데, 이후 더 강경해졌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19일(현지시간) 공개된 영국 언론인 피어스 모건의 유튜브 토크쇼 영상에서 "돈바스 지역은 우리 가치의 일부"라며 "이것은 땅의 문제가 아닌 사람의 문제"라고 주장했다. 뮌헨 안보회의에서 그가 "전쟁 첫날에도 우리(우크라이나군)가 도망치지 않았는데, 이제 와서 왜 그냥 물러나야 하느냐"고 반박한 것과 같은 맥락이다.
더욱 충격적인 소식은 그가 참모들에게 3년 더 전쟁을 계속할 준비를 지시했다는 미 WSJ의 보얀 판체프스키 기자의 주장이다. 판체프스키 기자는 20일 폴 론자이머 독일 빌트지 편집국장과 가진 스포티파이 팟캐스트 인터뷰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목요일(19일) 측근들에게 직설적으로 전쟁 준비를 지시했다"며 "늦은 봄이나 초여름에는 어떤 내용이든 간에 합의된 협상안을 총선(대선)과 함께 국민투표를 부쳐 국민의 동의 여부를 받아낼 계획을 세우던 참모들은 충격을 받았다"고 주장했다.
젤렌스키 대통령 참모 3명은 판체프스키 기자에게 "대통령이 갑자기 태도를 180도 바꿔 '이건 다 헛소리야, 장기전에 대비해야 한다'고 말했다"며 "무슨 이유인지 모르겠지만, 그는 더 이상 협상할 마음이 없는 것 같다"고 전했다. 3자 평화 협상이 더 이상 만족스럽지 않다는 또 다른 표현으로 해석된다.

그의 이같은 입장 변화는 또 젤렌스키 대통령 참모진 내부에 균열이 나타나고 있다는 증거로 볼 수 있다는 게 스트라나.ua의 진단이다. 이 매체는 "대통령실이 서둘러 전쟁 3개년 계획 수립을 부인했지만, WSJ 기자가 이 정보를 단순히 지어냈을 가능성은 낮다"며 "그의 강경한 입장에 측근들이 충격을 받았다는 보도는 이번이 처음도 아니다"고 했다.
앞서 나온 미국 월간 애틀랜틱(The Atlantic)지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의 일부 참모들은 전쟁 종식을 위해 영토적 타협(도네츠크주 철군)을 받아들일 의향이 있지만, 대통령 자신은 이에 반대하고 있다. 실제로 그는 3자 평화 협상에서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가 아닌 우크라이나에 양보를 요구하는 것은 불공평하다고 불만을 드러냈다. 이에 대해 캐롤라인 리빗 미 백악관 대변인은 18일 "(트럼프) 대통령은 아마 여기서 불공평한 점은 수천 명의 우크라이나인과 러시아인이 이 참혹한 전쟁에서 죽어가고 있다는 것이라고 이야기할 것"이라며 미국의 종전 의지를 확고하게 전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3년 더'라는 기간도 주목할 만하다. 3년 후면 트럼프 대통령의 임기가 종료된다. 상당한 인명 및 영토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그 기간을 버텨내면 우크라이나에게 또 다른 기회가 올 수 있다는 기대감으로 해석된다. 하지만 젤렌스키 대통령도 이전에 러시아가 큰 대가를 치르더라도 2년 안에는 돈바스 전체를 장악할 수 있을 것으로 인정한 바 있다. 푸틴 대통령도 완전 점령에 18개월에서 2년 정도로 보고 있다.
3년이란 기간이 어쩌면 가장 현실적인 판단일 수도 있다. 미국 WSJ은 20일 유럽 관리들의 말을 인용, 우크라이나 전쟁은 앞으로 1년에서 3년 더 지속될 가능성이 높다고 보도했다. 이들은 전쟁 장기화의 원인으로 러시아의 불성실한 협상 태도를 지목했는데, 젤렌스키 대통령도 19일 엑스(X)에 "전쟁을 끝내는 데는 역사 헛소리가 필요없다. 단지 지연 전술일 뿐"이라고 러시아 대표를 직격했다. 제네바 3차 협상에서 러시아 대표단 단장으로 복귀한 메딘스키 크렘린 보좌관은 우크라이나 침공을 정당화한 러시아 수정주의 역사관의 주요 이론가다.
피브넨코 우크라이나 국가방위군 사령관도 20일 BBC 와의 인터뷰에서 "최전선을 따라 이루어지는 휴전이 우리가 받아들일 수 있는 조건"이라며 "그렇지 않을 경우, 3년 더 전쟁을 치를 준비가 되어 있다"고 주장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미-러 측의 설득이나 대통령 참모들의 불만만으로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강경 입장을 바꿀 가능성은 낮다고 스트라나.ua는 내다봤다. 우크라이나의 방어망이 급격히 무너지거나 트럼프 대통령이 대(對)우크라 군사지원을 완전 중단하는 등 실질적인 압력을 가할 때에만 가능하다고 했다. 아직까지는 그같은 징후가 보이지 않고, 우크라이나군은 나토를 통해 미국의 무기및 군사정보 지원을 받고 있다. 이에 따라 전쟁이 앞으로도 쉽사리 끝나지 않을 것이라는 전망이 갈수록 유력해지고 있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