튀르키예(터키) 앙카라에서 열린 나토(NATO) 정상회의에서 정상들은 적어도 25년 만에 가장 짧은 공동선언문을 채택하고 8일 헤어졌다. 미-이란 전쟁을 계기로 나토에 불만을 가진 트럼프 미 대통령의 심기를 더 이상 건드리지 않기 위해 현안에 대한 핵심 내용만 간략하게 담은 것으로 보인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와 베도모스티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나토는 이날 공동선언문에서 러시아(와 테러 세력)를 장기적인 위협으로 규정한 뒤 500억 달러가 넘는 규모의 새로운 방위산업 조달 계획을 승인하고, 올해(2026년) 우크라이나에 700억 유로 상당을 지원하기로 약속했다.
공동선언의 주요 내용을 보면,
-규약 제5조에 따라 집단 방위에 대한 의지를 재확인한다
-러시아와 테러리즘으로부터의 장기적인 위협에 대응하기 위해 500억 달러 규모의 신규 방위산업 공동조달 계획을 추진한다.
- 유럽 회원국들과 캐나다는 핵무기와 재래식 무기, 미사일 방어 능력, 사이버 전쟁 역량을 높이고, 정밀 타격 능력과 통합 공중 및 미사일 방어, 무인 시스템, 첨단 기술, 정보 등 모든 분야에 걸쳐 군사력 증강에 투자한다.
- 올해 우크라이나에 700억 유로를 지원하고, 2027년에도 비슷한 수준의 지원을 유지한다.
유럽 주요 국가들이 G7 정상회의에 이어 트럼프 대통령을 우크라이나 지원 노선으로 끌어들이려는 노력은 일단 성공한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대신 유럽 회원국들이 군사 예산을 늘려 500억 달러의 신규 방위산업 공동조달 계획(미국의 무기 구매/편집자)을 추진하도록 했다.
러-우크라 양국에 가장 관심이 있는 대목은 역시 대(對)우크라이나 지원 부분이다.
공동선언문은 "2026년 우크라이나에 약 700억 유로 규모의 군사 장비와 훈련, 재정 지원을 제공하고, 내년에도 최소한 같은 수준의 지원을 이어간다"고 확인했다. 우크라이나로서는 향후 2년 간 나토로부터 약 1,400억 유로의 군사 지원을 받게 되는 셈이다. 유럽연합(EU)이 차관 형식으로 2년간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한 규모와 같다. EU로부터 연 700억 유로를 지원받더라도 군사및 재정적 부족액이 수백억 달러에 이르는 만큼, 나토의 군사 지원은 천군만마나 다름없다.
나토 정상회의를 앞두고 러시아 본토의 정유공장을 타격하면서 전장의 흐름을 바꿨다고 주장하고, 키예프(키이우) 등 우크라 전역의 공습 피해 상황을 인터넷에 공개하며 패트리어트 방공 미사일의 부족을 호소한 노력이 어느 정도 보상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겉과 속이 100% 같을 수는 없다. 나토의 지원 금액은 EU의 대(對)우크라 군사 지원 부분을 포함하기로 했다. EU와 나토에 모두 가입한 대부분의 유럽 회원국들에게 이중 부담을 지우지 않기 위해서다. 따라서 실질 지원 금액은 발표된 700억 유로와 많은 차이가 날 것으로 예상된다.
나토의 대(對)우크라 군사 지원은 주로 방공망 구축과 방공미사일·탄약 공급, 장갑차와 각종 군사장비 지원, 병력 교육 및 훈련, 군수물자 제공, 정보 및 정찰 지원, 기타 군사 재정 지원 등이다.
이번 정상회의에서 공동선언문보다 더 관심을 끈 것은 역시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정상회담이었다. 특히 두 정상의 브리핑(기자회견) 자리에서 눈길을 끌만한 발언들이 쏟아졌다.
스트라나.ua는 8일 "트럼프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이 회담 후 가진 공동 브리핑(기자회견)은 우크라이나에서 큰 반향을 불러 일으켰다"며 "△러시아 정유 시설 공격에 대한 지지와 △패트리어트 미사일 생산 허가 약속 △젤렌스키 대통령에 대한 찬사까지 트럼프 대통령의 입에서 놀랄 만한 발언들이 나왔다"고 보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정유 시설 공격을 사실상 지지하고, 이를 '전쟁 종식으로 이어지는 확전'으로 규정했으며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패트리어트 미사일 생산 허가를 내주고 △우크라이나산 드론의 구매 의향을 밝혔다는 것이다. 또 젤렌스키 대통령을 칭찬하면서 "그가 위대한 나라를 건설할 것"이라고도 했다.
스트라나.ua는 그러나 "이란과의 협상 과정에서 목격한 대로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은 실질적인 조치라기보다는 크렘린과의 협상을 위한 사전 행보에 더 가까워 보인다"고 짚었다.

실제로 트럼프 대통령은 거의 매일 러시아의 공습을 받고 있는 우크라이나에게는 지금 당장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필요한데, 제공 약속보다는 생산 허가 카드를 던졌다. 이는 생산 시설 구축과 인력 훈련, 생산후 시험 등 각단계를 감안하면 먼 미래에나 가능하다는 것이다. 패트리어트 미사일 생산 허가를 약속한 뒤 트럼프 대통령은 "이제 누구도 우리가 우크라이나에 무기를 지원하지 않는다고 비난할 수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미국은 할 일을 다 했으니 더 이상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달라고) 조르지 말라는 뜻으로 해석된다. 또 "요격(패트리어트) 미사일 생산은 복잡한 사업이라서 즉시 모든 것을 가동할 수는 없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우크라이나 드론 구매에 관해서도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서 구체적인 것은 아무 것도 없다. 자칫하면 '립 서비스'에 그칠 지도 모른다.
나토 공동선언문의 대(對)우크라 700억 유로 지원 약속에 대해서도 스트라나.ua는 의구심을 표시했다. 선언적인 문구에 불과할 뿐, 회원국들의 구체적인 결정이 뒷받침되어야 실현 가능하다는 것이다. 나토 정상들은 이전에도 국방비 지출이 GDP의 일정 비율(목표는 5%)에 도달해야 한다고 선언했지만, 많은 국가들이 이를 무시해 왔다고 스트라나.ua는 썼다.
트럼프 대통령이 이란과의 협상 과정에서 보인 '갈지(之)자' 행보를 생각나게 하는 것은 러시아 정유 시설 공격에 대한 지지 발언이다. 일각에서는 "확전이 전쟁 종식을 앞당긴다"는 그의 발언은 진짜 놀랍지만,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 평화협상에서도 자신만의 협상 전술을 고수하고 있다는 분석이 나온다. 트럼프 대통령은 이란과의 협상 과정에서 실제 상황이야 어떻든, 항상 강한 입장에서 협상을 주도하는 것처럼 보이기를 원했다. 그는 몇 주 동안 이란을 거의 파괴할 듯이 다양한 제재를 가하겠다고 위협하다가 결국 상당한 양보를 했다. 겉으로는 테헤란을 압박해 협상이 타결된 것처럼 의도적인 연출을 했지만, 실제로는 미국이 상당한 양보를 한 결과, 타결됐다는 것. 미국이 이란과의 전쟁에서 패했다는 주장이 나오는 이유다.
스트라나.ua는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평화협상의 타결을 위해 러시아를 압박(우크라이나에 대한 패트리어트 생산 허가, 러시아 본토 정유 시설 공격 지지 등)하는 모습을 연출한 뒤, 실제로는 파격적인 양보(대러 제재 전면 해제와 경제협력, 우크라 점령 영토 인정,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금지 등)를 할 수도 있다고 내다봤다.

문제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같은 수정 제안을 푸틴 대통령이 수락할 지 여부다. 크렘린이 지난해 8월 미-러 정상 간의 '앵커리지 정신(합의)'를 내세워 우크라이나군의 돈바스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고 있다. 향후 두 정상의 전화 통화 후 발표가 주목된다.
콤소몰스카야 프라브다(KPRU)등 러시아 언론은 이날 "트럼프 대통령이 기자회견(브리핑)에서 이란을 일본으로, 젤렌스키 대통령을 푸틴 대통령으로 몇 차례 말실수를 했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의 모스크바행 여부에 대한 일화를 소개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은 (모스크바의 젤렌스키 초청 이이야기가 나오자) "모스크바에 갔을지도 모르지요. 당신이라면 모스크바에 갔겠습니까?"라고 옆에 앉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물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어려운 질문이네요. 모스크바 상공에 우크라이나 드론이 많이 날아다니고 있어요. 위험하죠"라고 농담처럼 받았다. 신변의 위협을 느껴 모스크바에는 안가겠다는 본심을 드러낸 것으로 보인다.
트럼프 대통령은 또 "평화협상이 타결된 뒤 필요하면 미국이 우크라이나 상공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할 수도 있다"고 말했다. 메드베데프 러시아 안보회의 부의장(전 대통령)이 즉각 '나토와 러시아 간의 전쟁으로 이어질 것'이라고 경고할 정도로 비행금지구역 설정은 예민한 문제다. 트럼프 대통령은 "필요하다면 그렇게(비행금지 구역 설정) 하겠다"면서도 "그러나 평화 협정이 체결된다면 이는 문제가 되지 않을 것"이라고 부연했다.
비행금지구역 설정은 2년 전, AFP 통신이 키예프(키이우)가 러시아의 공습을 격퇴할 방공 시스템이 부족하다는 이유로 우크라이나 서부에 비행금지구역 설정을 유럽에 압박하고 있다고 보도하면서 불거진 이슈다. 이어 지난해 9월에는 시코르스키 폴란드 외무장관이 동맹국들에게 우크라이나 영토 상공에 비행금지구역을 설정하는 방안을 고려해 줄 것을 제안하면서 "나토와 EU가 기술적으로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미 일간지 뉴욕 타임스(NYT)는 유럽안보협력기구(OSCE) 주재 미국 대표를 역임했던 마이클 카펜터의 말을 인용해 "미 국방부가 비행금지구역 설정안을 지지할 가능성은 낮다"고 지적했다. "비행금지구역 설정은 '대리전에서 직접 대결로의 전환'을 의미하기 때문"이라는 이유를 댔다. NYT는 또 "비행금지구역 설정으로 우크라이나 영공 방어에 나설 경우, 나토는 딜레마에 직면할 것"이라며 "러시아의 드론을 막지 못하면 나토의 무력함을 드러내는 꼴이 되고, 값비싼 미사일을 사용해 러시아 드론을 요격하는 것은 나토의 무기고를 빠르게 고갈시킬 것"이라고 우려했다.

우크라이나 평화 협상을 중재하는 트럼프 대통령은 어려움을 솔직히 인정하기도 했다. 그는 전날(7일) 정상회의 주최자인 에르도안 튀르키예(터키) 대통령과의 만난 뒤 "푸틴 대통령과 젤렌스키 대통령 모두 전쟁을 끝내기를 원한다"고 주장하면서 "그러나 협상은 쉽지 않다"고 말했다. 러-우크라 양측이 자신들이 설정한 양보 마지노선에서 한발자국도 물러나지 않으려 한다는 것이다. 우크라이나군의 돈바스(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 철수를 주장하는 러시아에 맞서 우크라이나는 현전선에서의 휴전은 가능하지만, 영토 양보는 절대 안된다는 원칙을 고수하고 있는 상태다.
배석한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본토 타격이 전황에 변화를 주고 있다"며 "우리는 전쟁을 끝내기 위한 협상의 조건을 만들고 있다"고 거들었다. 미국이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본토 정유공장 공격에 좌표 설정 및 방공망 회피 등 군사정보상 도움을 주고 있다는 서방 언론(파이낸셜 타임스·FT)의 보도를 확인해 주는 장면이라고 한 언론은 짚었다.
우크라이나의 러시아 본토 공격만으로 크렘린이 특수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의 목표를 수정할 것으로 믿는 것은 너무 순진해 보인다. 러시아군은 현재 돈바스의 '우크라이나 요새 벨트'를 더디지만 하나씩 공략해 들어가고 있다. 러시아군은 이미 콘스탄티노프카(콘스티안티니우카)를 장악한 뒤 마지막으로 남은 슬로뱐스크-크라마토르스크를 향해 진격중이라고 발표했다. 정보의 진위 여부를 떠나 러시아군의 군사적 목표는 분명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은 이제 양국의 군사력 우열을 넘어 경제·사회·심리적 안정을 계속 유지하는 편이 군사적으로든, 외교적으로든 최종 승리하는 게임으로 변한 상태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