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피니언
우크라이나 전쟁의 언론 보도를 다룬 책 '우크라이나전 3년째 전쟁 저널리즘'(이진희 저, 맑은 샘 2024년 10월 발간)의 '지은이의 말' 두번째 단락은 이렇게 시작한다.
"개전 첫 해부터 주변 사람들로부터 ‘전쟁이 어떻게 될 것 같으냐’는 질문을 가끔 받았다. 러시아가 특수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한 달여 만에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키이우)에서 포위망을 풀고 군대를 물릴 때, 점령한 북부 하르코프주(州)와 남부 헤르손주에서 철군할 때, 러시아 군사(용병) 기업 ‘바그너 그룹’이 군사반란을 일으킬 때, 질문자의 얼굴 표정에는 ‘러시아가 지는 거지?’라고 확인하고픈 의도가 묻어났다.
“러시아가 지지는 않겠지”라는 필자의 답변에 ‘뭘 제대로 모르는 사람’으로 보는 듯한 느낌도 살짝 비쳤다. 전쟁 2년 6개월여가 지난 지금, ‘우크라이나가 지는 거 아닌가’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많아진 것 같다. 왜? 우리가 보고 듣는 언론들이 이전과는 좀 다른 흐름을 전달하고 있기 때문이다.
러시아군의 전력이 갑자기 강해진 것일까? 아니다. 지난 2년 몇 개월 동안 공격권은 대체로 러시아에 있었다. 우크라이나군은 선방(善防)하는 정도였다. 방어에 치중하다 가끔 반격을 가하곤 했지만, 전쟁의 흐름을 바꾸기에는 역부족이었다. 이기는 것과 선방하는 것은 엄연히 다를 텐데, 선방을 부각시켜 여러 번 강조하다 보니 은연중에 ‘이길 수도 있다’는 메시지를 심어준 것은 아닐까 싶다."
이와 비슷한 현상이 최근 또 일어나고 있는 듯하다.
국내 한 중앙지가 7일 '푸틴, 결국 패배할까…“우크라, 러 드론 91% 요격” 전황 뒤집혔다'는 도발적인(?) 제목을 단 전쟁 분석 기사 (밀리터리+)를 실었다.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의 대규모 미사일·드론 공격을 막아내고(요격률 90.75%) △러시아가 심각한 병력 부족과 내부 반발 등에 시달리고 있으며(미 CNN 5월 20일 보도) △월 3만~4만명 수준의 사상자로, 러시아는 병력 충원에 어려움을 겪고(서방 정보당국 주장)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의 동부 전선 돌파와 점령 지역 확대에서 뚜렷한 성과를 내지 못하고 있다(빼앗은 영토보다 빼앗긴 영토가 더 넓다는 미 전쟁연구소 분석)는 것 등을 그 이유로 들었다.
반대로 우크라이나 공세는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드론 전력을 활용해 러시아 본토 깊숙한 곳에 있는 에너지, 군수시설까지 타격하며 전쟁의 양상을 바꾸고 있다는 것이다. 5월 9일 러시아의 전승 기념일 행사를 앞두고 장거리 드론으로 크렘린에서 가까운 고급 아파트를, 이달 초 상트페테르부르크 국제경제포럼(SPIEF)의 개막 직전 상트페테르부르크 항만 시설을 타격한 것 등을 대표적인 예로 들 수 있을 것이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태자면, 우크라이나군이 중거리 드론으로 러시아군의 후방 보급망(크림반도, 러시아군 점령 우크라이나 영토와 연결되는 러시아 일부 지역)을 마비시켰다는 주장도 나온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최근 행보도 승리 혹은 전황 변경에 대한 자신감으로 해석된다. 그는 지난 4일 푸틴 대통령에게 보낸 공개 서한에서 러시아를 ‘중국에 의존하는 쇠퇴하는 강대국’, "북한의 도움 없이는 버티지 못했을 것”이라고 비하하며 러시아의 자존심을 긁었다.
책 발간 이후 1년 8개월여가 흘러갔지만, '지은이의 말'을 현 상황에 대입하더라도, 틀릴 게 별로 없다는 생각이다.
러시아군은 5월 24일, 6월 2일 밤 잇달아 최대 규모 공습으로 수도 키예프(키이우)를 불바다로 몰아넣었다. 수천명의 키예프 시민들은 공습을 피해 지하철에서 밤을 보내야 했다. 하르코프(하르키우)와 오데사 등 주요 도시들도 러시아의 대규모 공습에 만신창이가 되고 있다. 도시 인프라 파괴는 물론, 어이 없는 인명 손실까지 피해 상황은 쉼없이 현지 언론과 인터넷에 올라온다. 국내 언론에 일일이 보도되지 않는다고 해서 러시아 공습이 중단된 것은 아니다.
우크라이나 군사 인플루언스들은 군 당국의 방공 시스템 성능에 불만을 터뜨리고 공군 측도 이를 사실상 인정했다. 얼마나 급했으면 젤렌스키 대통령이 트럼프 미 대통령에게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빨리 보내달라고 서한까지 보냈을까? 하지만 미국의 답은 최근까지 오지 않았다.
우크라아나군의 높은 목표물 요격률 어쩌구하는 것은, 따지고 보면 '우크라이나군의 선방(善防)' 정도에 불과하다. 방어에 치중하다 가끔 반격을 가하곤 했는데, 전승절 모스크바 도심 공격과 SPIEF행사 시 상트페테르부르크 항만 타격이 그것이다. 특히 그때나 지금이나 이기는 것과 선방하는 것은 엄연히 다를 텐데, 외신들이 우크라이나의 선방과 기습적인 반격을 부각시키고 또 ‘우크라이나가 이긴다'는 일방적인 젤렌스키 대통령의 메시지를 우리에게 전하고 있지 않나 우려스럽다.
우크라이나 측이 이같은 프로파간다(선전전)에 적극적으로 나서는 이유는 분명히 있다. 이란 전쟁으로 멀어져 가는 미국과 유럽연합(EU), 나토(NATO) 등 지원 세력의 관심을 붙잡고, 러시아군의 키예프 대공습에 불안해하는 민심을 달래기 위해서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가장 큰 고민은 역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변심이다. 미-러 앵커리지 정상회담 이후 트럼프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의 돈바스 철군과 미국의 대(對) 우크라 안보 보장을 맞바꾸는 방식으로 종전을 밀어붙이고 있다. 이를 뒤집으려면 '우크라이나가 이길 수도 있다'는 이미지를 심어주는 게 우선 중요하다.
대(對)EU 전략에서는 오르반 헝가리 총리가 퇴진한 지금이 최대 호기다. EU로부터 2년에 걸쳐 900억 유로 상당의 지원금을 확보한 상태에서, 회원국들이 거의 겹치는 나토로부터 비슷한 규모의 지원금을 받아내는 게 우크라이나 정권의 목표다. 기본 방향이 정해질 나토 정상회의(7월 7, 8일 튀르키예·터키 수도 앙카라)가 한달 앞으로 다가왔다. 회원국들의 마음을 잡아야 한다. 어차피 전쟁에서 질 것이라고 회원국들이 여긴다면 지원에 소극적일 수밖에 없다. 조금만 더 도와주면 러시아를 패퇴시킬 수 있다는 확신이 서야 한다. 나토 회원국들에게 그같은 믿음을 심어주기 위해 우크라이나 당국은 "러시아군의 사상자 수는 사상 최대" "러시아는 곧 붕괴한다"는 프로파간다전을 펼치고 있다고 보는 게 타당하다.
2025년 6월 헤이그에서 열린 나토 정상회의에서 유럽 회원국 정상들과 함께 한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9일 국내 모 신문에 실린 파리드 자카리아 미 워싱턴포스트(WP) 칼럼니스트의 기고에서도 유사한 논리가 발견된다. 그는 '트럼프, 러-우 전쟁 종식의 기회 왔다'는 제목의 기고문에서 "우크라이나는 현재 경제 규모가 약 12배, 인구가 4배 이상인 적국을 상대로 5년째 전쟁을 치르고 있다"면서 "우크라이나의 생존 그 자체가 현대사의 위대한 국가적 성취 중 하나였고, 이제 우크라이나는 단순히 생존하는 것을 넘어서 전쟁의 계산법을 바꾸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리고 그동안 러시아가 전쟁을 주도해온 방정식이 이제 깨지기 시작했다고 강조했다. 그 이유와 논리는 국내 언론과 거의 다를 바 없다.
다른 점이 있다면 '이제 트럼프 대통령이 등판할 때'라는 결론 부분이다. "푸틴 대통령의 승리에 대한 두 가지 이론은 우크라이나가 약하고 서방이 지칠 것이라는 점이 전제다. 그러나 둘 다 무너졌다. 이것이 트럼프 대통령에게 기회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도널드 트럼프, 기회가 왔으니 늦지 않게 등판하라'고 촉구한 것이다. 지금까지의 친(親)러시아 노선을 버리고 우크라이나편에 서서 전쟁 종식의 전환점을 마련하라는 주장이다. 우크라이나가 프로파간다를 통해 원하는 결과가 바로 이것이다. 그러나 그의 논리를 뒤집으면, 미국이 우크라이나를 돕지 않으면, 우크라이나는 여전히 이길 수 없다는 말과 같지 않나 싶다.
여기서 궁금한 것은 트럼프 대통령이 진짜 서방 진영이 원하는 대로 등판할지 여부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9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 기사 중 '전쟁에 전환점이 있을까?' (Есть ли перелом в войне?)라는 코너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오늘(9일) 발트 연안의 에스토니아에서 올여름이 전쟁의 전환점이 될 수 있을 것으로 시사했다고 전했다. 그는 (에스토니아의 수도) 탈린에서 열린 북유럽및 발트 연안 국가(NB8) 정상회의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올해 6월과 7월은 많은 것을 결정짓는 시기가 될 수 있다"며 "EU, G7, 나토 정상회의에서 이루어질 협상과 결정에 대비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나토 정상회의에서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700억 유로의 추가 지원 여부가 논의될 것으로 전해졌다. 다만, 미국은 이 논의에서 빠질 것이라고 한다.
탈린에서 열린 북유럽및 발트연안 국가(NB8) 정t상회의 참석 후 공동 기자회견에서 나선 젤렌스키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기자들 앞에 젤렌스키 대통령 등과 나란히 선 알라르 카리스 에스토니아 대통령은 "올여름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식시킬 기회가 생길 수 있다"며 "이에 대비하기 위해 러시아에 압력을 가해 전쟁을 종식시키도록 해야 한다"고 말했다. 젤렌스키-카리스 대통령의 발언은 '전쟁의 판도가 키예프에게 유리하게 바뀌었다'는 정보전이 진행되고 있는 가운데 나와 주목을 끌었다.
스트라나.ua는 "지난 3년 간의 전쟁 기간 중 가장 불리한 입장에 처한 러시아가 '앵커리지 합의'(우크라이나군의 돈바스 철수)에 대한 주장을 철회하고, 키예프와 유럽이 제시한 평화 방안을 수용하도록 압력을 가해야 한다는 뜻"이라고 그 의미를 짚었다. 그 전 단계로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날(8일) 메르츠 독일, 마크롱 프랑스, 스타머 영국 정상과 4자 회담을 갖고 '평화 협상의 전제 조건을 발표했다. 이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트럼프 대통령의 전쟁 종식 노력에도 불구하고 유럽은 러시아와의 전쟁을 계속할 수밖에 없다는 주장으로 들린다.
안타깝게도 트럼프 대통령이 등판할 조건이 갖춰졌다는 정세 분석에 대한 반론이 키예프 내부에서 나오기 시작했다.
스트라나.ua는 "우크라이나군이 전장에서 전환점을 맞았다고 믿는 사람은 키예프에서도 많지 않다"며 드미트리 쿨레바 전 외무장관의 발언을 소개했다. 쿨레바 전 장관은 전쟁 발발 전부터 국제사회에 우크라이나 지원을 호소한 대표적인 '스피커'(인사)다.
쿨레바 전 장관은 9일 현지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전쟁의 전환점이 오고 있다'는 세간의 평가에 대해 "사람들이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것을 막는, 숨 막히는 사람이 되고 싶지는 않지만, 11월이 되면 우리 모두는 겨울을 어떻게 견뎌낼 지에 대한 논의를 다시 시작해야 할 것"이라며 "터무니없는 소리"라고 일축했다. 그는 "인류 역사상 어떤 사건이 일어난 순간, 전쟁의 전환점으로 규정된 적은 없다"며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스탈린그라드 전투 후 주코프 소련 원수가 스탈린에게 가서 전쟁의 전환점이라고 보고했느냐? 아니면 나치 독일의 만슈타인 장군이 쿠르스크 전투에서 패배한 뒤 히틀러에게 전화해 '히틀러 동지, 죄송합니다만, 전환점이 왔습니다. 베를린은 2년 안에 함락될 것입니다'라고 말했느냐? 말도 안 되는 소리"라고 비판했다. 그는 "전쟁의 전환점? 우크라이나의 전세 역전, 그리고 이제 크렘린으로 달려가자는 소리 등은 모두 허튼소리"라며 "어떤 이들에게는 이러한 주장이 유용할 수 있다는 점은 이해하지만, 우리는 냉철함을 유지해야 한다"고 강조했다. 또 "나는 이성적으로 판단하는 것을 전적으로 지지한다"고 덧붙였다.
쿨레바 전 장관의 주장이 또 정답이라고 믿을 만한 근거는 없지만, 전쟁은 상대가 있는 게임이다. 그 상대인 러시아 크렘린의 페스코프 대변인은 지난 2일 '젤렌스키 대통령이 겨울에 오기 전에 전쟁을 끝내라'고 했다는 부다노프 대통령 실장의 전언에 이렇게 논평했다.
"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점령 지역에서 철수한다면 전쟁은 오늘이라도 당장 끝낼 수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가 철수 명령만 내리면 된다."
러시아 점령지역은 돈바스(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를 비롯해 자포로제(자포리자), 헤르손 4개 주를 말한다. 우크라이나에서 독립을 선언한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과 루간스크인민공화국(LPR), 그리고 러시아가 통제하는 헤르손과 자포로제 일부 지역은 2022년 9월 말 러시아 연방 편입을 묻는 국민투표를 실시했고, 푸틴 대통령은 그해 11월 이들 지역을 러시아에 편입시키는 헌법 개정안에 서명했다. 러시아는 앵커러지 미-러 정상회의에서 4개 지역 중 2개 지역(자포로제와 헤르손)을 양보하면서, 돈바스 지역은 완전히 차지할(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주 철군)할 뜻을 분명히 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러시아와의 이같은 딜(거래)를 없던 일로 하고 우크라이나 편으로 불쑥 등판할까? 아직은 아닌 것 같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