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를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생각보다 자주 이 국기를 마주하게 된다. 관공서 앞에서도 보이고 학교에서도 보인다. 스포츠 경기장에서는 말할 것도 없다. 하지만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러시아 국기의 의미는 잘 모른다. 흥미로운 사실은 러시아 정부 역시 이 세 가지 색에 대한 공식적 해석을 법률이나 국가 문서로 규정한 적이 없다는 점이다. 이 때문에 오늘날까지도 다양한 해석이 공존한다. 가장 널리 알려진 설명은 흰색은 고결함과 정직, 파란색은 충실함과 신앙심, 빨간색은 용기와 희생을 상징한다는 것이다. 이는 유럽 문장학의 전통적 해석과도 맞닿아 있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은 하나의 해석만으로 역사를 설명하지 않는다. 일부 역사학자들은 러시아 삼색기의 기원을 옛 루시(Rus)의 역사적 구성 지역에서 찾는다. 현재 러시아의 중심부를 의미하는 대루시(Великая Русь), 오늘날 벨라루스 지역인 백루시(Белая Русь), 그리고 현재 우크라이나 일부 지역에 해당하는 소루시(Малая Русь)가 그것이다. 각각의 지역은 적색, 백색, 청색으로 상징됐고 훗날 이 세 가지 색이 국가의 상징체계로 흡수됐다는 해석이다.
러시아 국기의 역사는 의외로 바다에서 시작된다. 17세기 말 러시아는 아직 본격적인 해양국가가 아니었다. 당시 젊은 차르였던 표트르 1세는 국가 근대화와 해양 진출이라는 국가전략을 추진하며 유럽 각국을 직접 돌아다녔다. 그가 가장 중요하게 생각한 것은 함대 건설이었다. 강대국의 조건이 육군만이 아니라 해군에도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바다로 나가기 위해서는 함대가 필요했고, 함대에는 국가를 상징하는 깃발이 필요했다. 이 과정에서 등장한 것이 오늘날의 백·청·적 삼색기다. 흔히 러시아 국기가 네덜란드 국기를 모방한 것이라는 이야기가 알려져 있다. 실제로 두 국기는 매우 유사하다. 하지만 러시아 문장학자들은 표트르 1세가 네덜란드를 방문하기 이전부터 이미 삼색기를 사용한 기록이 존재한다고 설명한다. 따라서 러시아 삼색기는 단순한 차용이라기보다 러시아 전통과 유럽 해양문화가 결합된 산물로 보는 것이 보다 타당하다는 평가가 나온다. 중요한 것은 이 깃발이 처음부터 국가권력을 상징한 것이 아니라 해상 교역과 선박을 상징하는 기였다는 점이다.
19세기에 들어서면서 러시아는 독특한 상황을 맞이한다. 하나의 국가 안에서 사실상 두 개의 국기가 공존하게 된 것이다. 오늘날의 백·청·적 삼색기와 함께 흑색·황색·백색으로 구성된 이른바 제국기가 등장했다. 당시 황제 알렉산드르 2세는 제국기를 공식 국기로 승인했다. 흑색과 황색은 러시아 제국 문장에 사용된 쌍두독수리에서 가져왔고, 백색은 러시아의 수호성인인 성 게오르기우스를 상징했다. 그러나 후계자인 알렉산드르 3세는 다시 삼색기를 국가의 대표 깃발로 인정했다. 결국 러시아 제국은 오랫동안 두 개의 상징체계를 동시에 사용하게 된다. 국가기관은 제국기를 사용했고, 무역과 민간 영역에서는 삼색기가 사용됐다. 이는 단순한 깃발의 차이가 아니었다. 유럽을 향한 개방성과 제국적 전통이라는 두 개의 국가 정체성이 충돌하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 현상이었다.
1848년 프라하 범슬라브회의 이후 러시아 삼색기는 또 다른 의미를 획득하게 된다. 백색, 청색, 적색은 슬라브 민족의 단결을 상징하는 범슬라브 색채로 채택됐다. 이후 체코, 슬로바키아, 세르비아, 크로아티아, 슬로베니아 등 수많은 슬라브 국가들이 유사한 색 조합의 국기를 사용하게 된다. 오늘날 동유럽 여러 국가의 국기를 보면 비슷한 색채 구성을 발견할 수 있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1917년 러시아 혁명은 국기의 운명도 바꾸었다. 제정 러시아를 상징하던 삼색기와 제국기는 모두 역사 속으로 사라졌고, 낫과 망치 그리고 붉은 별이 새겨진 적기(赤旗)가 새로운 국가의 상징으로 등장했다. 이후 70년이 넘는 소련 시기 동안 적기는 단순한 국기가 아니라 하나의 이념과 체제를 상징하는 정치적 표상이 됐다. 오늘날에도 러시아의 공산당 집회나 재향군인 행사에서 적기를 쉽게 볼 수 있는 이유는 이 깃발이 여전히 많은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있기 때문이다.
1991년 소련이 해체되면서 백·청·적 삼색기는 다시 러시아의 공식 국기로 복귀했다. 그러나 러시아 국기를 단순히 세 가지 색깔의 조합으로 이해하는 것은 부족하다. 그 안에는 제정 러시아의 기억도 있고 소련의 기억도 있다. 표트르 대제가 꿈꾸었던 해양국가의 비전도 있고 로마노프 왕조가 추구했던 제국의 이상도 담겨 있다. 러시아 국기는 단순한 국가 상징물이 아니라 수 세기에 걸쳐 축적된 역사와 정체성의 압축된 서사라고 할 수 있다.
러시아 국기를 바라보면 사람들은 먼저 색깔을 본다. 그러나 러시아인들이 보는 것은 색깔이 아니라 역사다. 흰색과 파란색, 그리고 빨간색 사이에는 표트르 대제의 함대도 있고 로마노프 왕조도 있으며 소비에트 연방도 존재한다. 러시아는 한 번도 하나의 얼굴만 가진 국가였던 적이 없다. 유럽을 지향했던 국가였고 동시에 제국을 꿈꾸었던 국가였으며, 혁명을 통해 과거를 부정했던 국가이기도 했다. 그렇기에 오늘날 러시아 국기의 진정한 의미는 세 가지 색깔 자체에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 다른 시대와 기억, 체제와 가치관을 하나의 천 위에 공존시키고 있다는 사실에 있다. 어쩌면 러시아 국기는 국가의 상징이기 이전에 러시아라는 문명의 복합성과 연속성을 보여주는 하나의 역사서에 가깝다.
최승현 에디터 buyrussia2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