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 Jan 2026

실리보다 명분 취한 젤렌스키 대통령, 런던 협상 실패의 덤터기 쓸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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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이냐, 실리냐?
우크라이나가 미-우크라-유럽 평화협상에서 명분을 고수하면서 미국 주도의 종전(휴전)협상이 좌초할 위기에 빠졌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파리에서 17일 열린 미-우크라-유럽 3자 회동을 매듭짓는 후속 회담인 런던 회담이 23일 사실상 무산됐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파리 회동에서 제안된 미국의 평화안에 거부 반응을 보이면서 마코 루비오 미 국무장관이 런던행을 포기했고, 영국과 프랑스 외무장관들도 예정된 런던 회담에 참석하지 않았다.

안드리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이 이끄는 우크라이나 대표단(시비가 외무, 우메로프 국방장관)은 유럽의 실무 대표단과 만났다. 우크라이나와 소통해온 키스 켈로그 미 우크라이나 특사도 회의장에 모습을 나타내지 않았다. 미국 측이 회담을 전면 보이콧한 것이다.

런던에 도착한 우크라이나 대표단/사진출처:예르마크 대통령 실장 텔레그램
런던에 도착한 우크라이나 대표단/사진출처:예르마크 대통령 실장 텔레그램

 

루비와 장관과 함께 파리 3자회동에 참석해 우크라-유럽 설득에 나섰던 스티브 위트코프 미 중동 특사가 탄 비행기는 모스크바를 향하는 것으로 추정됐다. 러시아 측과 향후 대처 방안을 모색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런던 회담 무산에 트럼프 대통령 격노?

장관급 런던 3자 회동이 무산되자, 트럼프 대통령과 루비오 국무장관 등 미국의 주요 정책 결정권자들은 우크라이나에 완전히 등을 돌릴 분위기다.
코메르산트 등 러시아 언론스트라나.ua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회담 결렬의 원인을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돌리며 강력하게 비난했다. 루비오 국무장관도 미국이 협상에서 손을 뗄 경우, 우크라이나는 앞으로 더 불리한 평화안을 받게 될 것이라고 경고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지난 2월 말 미 백악관에서 미-우크라 광물협정에 서명하려다 오히려 트럼프-밴스 미 정·부통령과 충돌한 직후의 미국 분위기와 비슷하다는 평이다. 당시 젤렌스키 대통령은 기자들이 보는 앞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명분에 집착하다가 현실 감각을 놓친 패착이었는데, 이번에도 비슷한 결과를 낳을 것이라는 우려가 나온다. 미국이 파리 3자 회동 이후 이미 경고한 대로, 평화협상에서 손을 떼면,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및 정보 제공도 자연스럽게 중단될 것이라는 관측에서다.

백악관 충돌 이후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해 군사 지원및 정보 제공을 전격적으로 중단하자, 젤렌스키 대통령은 부랴부랴 트럼프 대통령에게 사과 편지를 보내는 등 뒷수습에 허둥지둥한 바 있다. 비슷한 상황이 또 벌어질 것인지, 영국 등 유럽 일부 국가들(소위 의지의 연합)의 지원을 믿고 버틸 것인지, 지켜봐야 한다.

미 백악관에서 논쟁을 벌이는 젤렌스키-트럼프 대통령/영상 캡처
미 백악관에서 논쟁을 벌이는 젤렌스키-트럼프 대통령/영상 캡처

러시아도 강경한 입장으로 돌아섰다. 언론에 알려진 미국의 평화안을 번복하는 듯한 모습을 보였다. 
스트라나.uarbc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23일 "우크라이나 4개 지역(도네츠크주·州와 루간스크주, 자포로제·자포리자주, 헤르손주)의 러시아 영토로 헌법에 규정돼 있다"며 "우크라이나군이 이 지역에서 철수해야 군사 행동이 즉시 중단(휴전 혹은 종전)될 것"이라고 주장했다. 푸틴 대통령이 지난해 6월 천명한 우크라이나 평화협상의 전제 조건을 되풀이한 것이다. 하지만 미국이 파리 회동에서 제시한 평화안은 현 전선에서 적대행위를 중단하기로 했다. 푸틴 대통령이 영토적으로 양보한 것으로 해석되는 대목이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또 푸틴-트럼프 대통령간의 정상회담도 준비중이라고 확인했다. 그러나 런던 회담이 무산된 분위기에서 미-러 정상회담이 계획대로 준비될지는 불투명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명분 선택 

젤렌스키 대통령이 미국의 평화안을 장고 끝에 거부한 이유는 간단하다. 현재 전황이나 향후 전망, 근본적인 국력의 차이 등 현실을 반영한 평화안이라고 하더라도 러시아 측에 크게 기우는 제안은 '항복'으로 비칠 수도 있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다. 실리보다 명분을 택한 셈이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세계 주요 언론이 보도한 미국의 평화안은 대충 다음과 같다. 

△2014년 합병한 크림반도를 러시아의 영토로 인정하고 △현 전선에서 휴전한다.(러시아의 현재 점령지역 통제권 인정/편집자) △우크라이나는 나토(NATO)에 가입하지 않고(유럽연합·EU 가입은 가능) △미국은 2014년 이후 부과한 대(對)러시아 제재를 해제하고(유럽은 아직 동의 안함) △자포로제 원전을 독자적으로 운영해 우크라이나의 전력 부족 사태를 해결하며 △에너지 및 북극 개발 중심으로 러시아와 협력을 확대한다. 

이같은 언론 보도가 사실이라면, 러시아는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의 목적을 대략 달성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로서는 불만일 수 밖에 없다. 전쟁 발발 한달 뒤인 2022년 3월 말 이스탄불에서 열린 러-우크라 평화협상에서 타결된 합의안보다도 뒷걸음질 친 내용이기 때문이다. 3년 이상 수많은 목숨을 버리며 싸운 결과가 이 정도라면, 젤렌스키 대통령이 느끼는 미국에 대한 배신감을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하지만, 현실은 감정이나 낭만에 앞서는 법이다. 미국의 평화안을 수락하면 우크라이나는 '평화유지군'과 비슷한 외국군의 주둔으로 안보 불안을 부분적으로 해소할 수 있다. 또 4개주를 제외한 하르코프(하르키우)주의 점령지에서 러시아군이 철군하고, 헤르손주의 드네프르강 이용도 보장받게 된다. 또 (현재 러시아군이 장악한) 자포로제 원전으로부터 안정적으로 전력을 공급받을 수 있고, 재건 사업에 미국의 지원을 받을 수 있다. 

스트라나.ua는 "미국이 제안한 '거래'는 러시아에 큰 이득을 주는 것은 맞지만, 우크라이나의 항복과는 전혀 관련이 없어 보인다"고 지적했다. 

그러나 서방의 주요 언론들은 "미국의 평화안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는 미국의 명확한 안보 보장도 없이 영토만 잃게 되는 쓰라린 시련을 맞게 될 것"이라고 보도했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런던 회담을 하루 앞둔 22일 크림반도의 러시아 합병을 인정하지 않고, 자포로제 원전의 직접적인 통제권과 나토 가입을 주장하며, 런던에서는 휴전 문제만 논의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는 "휴전이 성사되면 다른 모든 문제도 해결될 것"이라는 논리를 폈다.

미국은 당연히 이 발언을 평화안의 거부로 받아들였고, 루비오 장관의 런던행을 포기하기로 했다. 

파리 미-우크라-유럽 대표단 모습/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파리 미-우크라-유럽 대표단 모습/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미국의 평화안은 우크라 항복이냐 아니냐

스트라나.ua는 "우크라이나 당국(젤렌스키 정권)은 처음부터 '시간은 우리 편'이라고 믿고 전쟁을 조기에 끝내는 데 반대했다"며 "계엄령 하에서 막대한 예산을 좌지우지하고, 국정의 모든 분야를 계속 엄격하게 통제하기를 원했다"고 지적했다. 이 매체는 또 "미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과 충돌한 것도 젤렌스키 대통령이 최전선에서 전쟁을 끝내기를 거부했기 때문"이라면서 "그러나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모든 군사적 지원을 중단하자, '앗 뜨거워라'며 30일간 휴전에 동의하는 등 미국의 휴전 의지를 따르기 시작했다"고 설명했다.

그같은 학습효과에도 불구하고 우크라이나 당국이 미국의 평화안을 거부한 것은, 미국의 도움 없이도 유럽의 지원에 의지해 전쟁을 계속할 수 있다는 판단 때문으로 보인다. 유럽의 일부 반(反) 트럼프 세력이 이를 부추긴 측면도 없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이 취임 100일 만에 우크라이나 휴전을 성사시키는 성과를 거두는 것을 원하지 않는 세력도 있다.

현실적으로 우크라이나가 미국의 지원 없이 얼마나 오랫동안 러시아와 전쟁을 계속할 수 있을지 의문을 제기하는 전문가들이 대다수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선택이 백악관 충돌에 버금가는 또하나의 패착이 될 수 있다는 우려도 자연스럽다. 

트럼프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전쟁에 더 이상 관심을 갖지 않고 러시아와의 양자 회담에 집중한다면, 우크라이나의 입지는 앞으로 더 줄어들 위험도 존재한다. 

우크라이나 정치학자 아나톨리 옥티슈크는 23일 "젤렌스키 대통령은 핀란드의 지도자(군 총사령관, 추후 대통령/편집자) 칼 구스타프 만네르헤임이 1940년과 1944년 소련과의 전쟁(통상 겨울전쟁으로 불린다/편집자)에서 겪었던 딜레마에 직면했다"며 "국민과 국가를 보존하고 발전 전망을 제시하며 어려운 평화를 받아들일 것인가, 아니면 계속 싸우다 지금보다 더 나쁜 조건으로 전쟁을 끝낼 것인가를 선택해야 한다"고 지적했다. 겨울전쟁 초기에 선전했던 만네르헤임 핀란드군 총사령관은 소련에 영토 일부를 할양하는 조건으로 평화협정 체결을 주도했다. 이후 핀란드는 나토에 가입(2023년 4월)하기 전까지 중립국 노선을 걸으며 러시아(소련)와 정상적인 외교 관계를 유지해왔다. 

전쟁 초기에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의 입 역할을 해온 알렉세이 아레스토비치 전 대통령실 고문은 한 인터뷰에서 "우리가 4개 지역을 러시아에 넘겨줘야 하는 이유는 간단하다. 앞으로 6개월이나 1년 안에 6개 지역을 빼앗길 테니까. 아니, 더 끌면 8개 지역을 넘겨줘야 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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