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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내에선 이재명 대통령의 참석 여부로 주목을 끌었던 나토(NATO) 정상회의가 25일 네덜란드 헤이그에서 이틀간의 일정을 끝냈다.
이번 정상회의는 2022년 2월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3년 간 이어온 강경한 반(反) 러시아 기조가 한풀 꺾인 외교 무대였다는 평이다. 또 아시아·태평양권에서 우리나라와 일본, 호주 정상들이 불참하는 바람에 나토 주도의 반러 동맹 구조도 상당히 빛이 바랬다. 나토 내부적으로는 마르크 뤼터 사무총장을 중심으로 1990년대 후반 러시아를 잠재적 파트너로 간주했던 기존 전략을 수정해 새로운 대러 접근 방식을 모색할 예정이었으나 사실상 실패했다.
그 뒤에는 러시아와의 갈등 관계를 심화사키지 않으려는 트럼프 미 대통령이 서 있다. 우크라이나 사태를 논의하는 '나토-우크라이나 협의회'의 정상회의도 미국의 반대로 취소됐다. 반면 미국이 주장해온 회원국 국방비의 GDP 대비 5% 증액은, 비록 불안정하지만 합의 모습을 갖췄다. '트럼프 원맨 쇼'라는 평가가 유럽 언론에서 쏟아져나오는 이유다.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 캐나다까지 날아갔던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이번에도 수모를 감수하고 헤이그를 찾았다. 캐나다 G7 정상회의의 일정을 단축하는 바람에 허탕을 쳤던 트럼프 대통령을 만나기 위해서였다. 목적은 미국의 추가 무기 지원과 대(對)러시아 휴전 압박 요청 두가지였다. 하지만, 이번 정상회의의 흐름은 이미 그 쪽이 아니었다는 걸 확인하고 돌아선 모양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25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 중 '나토 정상회의와 트럼프-젤렌스키 (대통령)의 만남'(Саммит НАТО и встреча Зеленского с Трампом)이라는 코너에서 "나토 정상회의의 공동성명에는 우크라이나가 단 한 번 언급되었다"며 "나토 가입 약속도, 러시아(의 침공)에 대한 가혹한 비판은 없었다"고 아쉬워했다.
공동성명은 "회원국들은 우크라이나를 지원하겠다는 지속적인 주권적 공약을 재확인했으며, 우크라이나의 안보는 나토의 안보에 기여한다"고 선언하는 선에 그쳤다. 반면 "우크라이나와 방위 산업체 유지를 위한 직접적인 기여는 회원국의 방위비 산출 과정에서 고려될 것"이라고 밝혀 GDP 대비 국방비 5% 증액의 명분으로 활용됐다는 비판도 있다. 회원국들은 '직접 군사비 3.5%+간접 비용 1.5%'로 트럼프 대통령이 요구한 '5%선'를 맞췄는데, 1.5%는 핵심 인프라 보호, 네트워크 방어, 시민 사회의 준비및 회복력 유지, 혁신 촉진, 방위 산업 기반 강화 등에 사용된다. 우크라이나 지원도 이에 포함될 것이라는 뜻이다.
◇우크라이나가 사라진 나토 정상회의
지난해 워싱턴 정상회의 공동성명과 비교하면 우크라이나 의제는 완전히 빠져버린 것이나 다름없다. 워싱턴 공동성명은 "우크라이나가 나토 회원 자격을 포함한 유럽·대서양과 완전한 통합을 향한 불가역적인 길(irreversible path)을 걷는 것을 계속 지원할 것"이라고 확인했다. 또 2025년 우크라이나에 최소 400억 유로(약 60조원) 상당을 지원하겠다고 약속했다. 우크라이나에 대한 장기적인 안보 지원 약속도,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대한 침략자라는 대목도, 중국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공에 결정적인 공범이라는 문구도 올해 헤이그 공동성명에서는 사라졌다.
그러다 보니, 공동선언은 A4 용지 1페이지 분량에 다섯 문단에 그쳤다. 그것마저 국방비 5% 증액에 초점이 맞춰졌다.

블룸버그 통신 등 외신에 따르면 헤이그 정상회의에서 우크라이나 문제가 소홀하게 다뤄질 것이라는 전망은 준비 과정에서 이미 나왔다. 트럼프 대통령 측의 요청에 따라 러시아에 대한 비판과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에 대한 언급이 공동성명에서 삭제되고, 젤렌스키 대통령을 아예 정상회의에 초대하지 않을 것이라는 보도도 잇따랐다.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와의 공동 기자회견에서 초대를 호소하는 등 우여곡절 끝에 젤렌스키 대통령은 헤이그 나토 정상회의에 참석했지만, 대접은 이전과 확연히 달랐다. 정상회의 본회의에 참석하지도 못했고, 나토+우크라이나 회의(나토-우크라이나 협의회)는 아예 없어졌다.
미국의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는 일부 회원국들이 나토+우크라이나 세션을 갖자고 제안했으나, 트럼프 대통령이 관심이 없다는 이유로 일정에서 제외했다고 전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캐나다 G7 정상회의에서 돌연 퇴장한 후, 나토 측은 그같은 사태가 헤이그에서 재현되는 것을 막기 위해 헤이그 정상회의의 일정을 축소했다는 것이다. 결국 이틀간의 일정에도 불구하고, 환영 만찬과 나토 이사회 회의(정상회의)만 진행되는, 두세 차례 회의가 열렸던 이전과는 사뭇 다른 일정으로 진행됐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개막 만찬에만 초대됐다.
어차피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동이 헤이그 정상회의 참가의 목적이었다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그 목적을 달성한 셈이다. 50여분간 단독으로 만났기 때문이다.
◇트럼프 대통령과의 만남 후 엇갈린 논평
지난 2월 말 백악관 회동에서 외교적 품위도 지키지 않는다는 미국 정가(政街)의 비판을 의식한 탓인지, 젤렌스키 대통령은 헤이그 정상회의에서는 격식 있는 검정 재킷을 입었다. 환영 만찬에서도, 트럼프 대통령과의 회동에서도 그의 '트레이드 마크' 격인 군복 티셔츠를 벗었다. 그가 전쟁 발발후 공식 석상에서 검정 재킷이라도 입은 것은 지난 23일 영국 찰스 3세와의 면담이 처음이었다. 이번 나토 정상회의가 두번째다.


트럼프-젤렌스키 대통령 만남은 지난 4월 26일 바티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 장례미사 전 약 15분간 독대한 이후 2개월 만이다. 지난 17일 캐나다 G7 정상회의에서는 트럼프 대통령의 조기 귀국으로 불발됐다.
하지만 그토록 바라던 성과는 그가 이번 만남에서도 손에 쥐지 못한 것으로 판단된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텔레그램을 통해 "트럼프 대통령과 만나 정말 중요한 모든 현안, 휴전과 진정한 평화를 이루는 방법과 우리 국민을 보호하는 방법 등에 대해 논의했다"며 "평화를 더욱 가까이 가져오려는 여러분의 관심과 의지에 감사드린다"고 썼다. 대(對)러시아 제재에 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다.
당황스러운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반응이다. 그는 공식 브리핑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와의 회담에 대해 논평하면서 "휴전에 대해 논의하지 않았으며, 그저 그(젤렌스키 대통령)가 어떻게 지내는지 보고 싶었을 뿐"이라고 말했다. 블룸버그 통신은 트럼프 대통령이 회담 전부터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만남에 전혀 열의가 없었다고 전했다.
그는 "힘든 시기도 있었지만, 그(젤렌스키 대통령)는 정말 친절했다"며 "그를 만나서 정말 기뻤고, 멋진 만남이었고, 전쟁을 끝낼 수 있는 좋은 시기"라고 입발림 소리를 늘어놨다.
푸틴 대통령에 대해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그에게 큰 문제이기 때문에 그만두고 싶어한다"며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을 위해 푸틴 대통령과 다시 대화할 수 있다"고 말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트럼프 대통령으로부터 방공 시스템과 군수 물자 공급에 대한 약속도 얻어내지 못한 듯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브리핑에서 '남편이 우크라이나군 현역으로 복무 중이며 자신은 해외에 거주하는 우크라이나 언론인'이라고 밝힌 한 여기자의 직접적인 질문을 받고 "그들(우크라이나)은 패트리어트 미사일을 원한다. 두고 보자. 우리도 패트리어트 미사일이 필요하다. 이스라엘에 제공했는데, 아주 효과적이다. 당연히 그들도 원한다. 아주 좋은 질문이다. 우리가 제공할 수 있기를 바란다"고 다소 엉뚱한 답변을 내놓았다. 외교적인 표현으로 해석하면 완곡한 거부 의사다.

대(對)러 제재 조치에 관해서는 대통령을 수행한 마코 루비오 국무장관이 기존 입장을 재확인했다.
폴리티코에 따르면 루비오 장관은 "대통령은 전쟁 종식을 원하고, 많은 사람들이 더 강력한 대러 제재를 요구한다"고 전제한 뒤 "의회가 대러 제재 법안을 통과시킬 수도 있다"고 인정했다. 그러나 "미국이 강력한 제재를 부과한다면, 그들(러시아)과 휴전을 논의할 협상력을 잃을 가능성이 높다"며 "대통령이 제재 부과에 필요한 유연성을 확보할 수 있도록 적절한 조치를 마련하고 체계화하는 방법을 의회와 논의하고 있다"고 말했다.
문제는 이스라엘-이란 전쟁과 휴전으로 미-러 관계가 더욱 복잡해졌다는 사실이다. 중동의 휴전은 여전히 불안정하고 언제든지 파기될 수 있기 때문에 추가 제재로 러시아를 자극하는 것은 미국의 자충수가 될 수 있다. 일정 기간이 지난 뒤 휴전이 깨질 경우, 러시아는 이란에 대한 군사 지원에 나설 수도 있기 때문이다. 심지어는 지금 당장이라도 군사 지원을 시작할 수 있다. 가까스로 성사된 이스라엘-이란 휴전이 지속되려면 러시아가 계속 중립을 지키는 게 중요하다고 미국은 판단할 수 밖에 없다.
물론, 트럼프 대통령도 러시아에 대한 불만을 표출했다. 헤이그에 도착하자마자 "우크라이나 상황이 완전히 통제 불능 상태"라고 말했다. 이후 나토 정상들과의 비공개 회의에서 이같은 인식을 거듭 피력한 뒤 "뭔가 조치를 취해야 한다"고 말한 것으로 알려졌다. 일각에서는 이 발언을 나토 회원국들이 러시아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하기 위해 국방비를 늘려야 한다고 압박한 쪽에 무게를 둔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어떤 의미이든, 나토는 이번 회의에서 방위비 5%증액에 합의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헤이그 정상회의의 가장 큰 성과는 트럼프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국방비를 GDP 대비 5%로 늘리기로 한 것이다. 트럼프 대통령은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미국과 나토의 승리"라고 말했다.
하지만, 가혹한 평가도 없지 않다. 이번 합의는 '당나귀가 죽느냐, 파디샤(군주)가 죽느냐'는 양 극단의 선택 상황에서 이뤄진 것이라는 게 스트라나.ua의 진단이다. 합의에 따르면 회원국들은 2035년까지 5% 증액을 달성해야 하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퇴임 후인 2029년 진행과정을 재평가하기로 했다. 이를 공동성명에 "2029년 전략적 환경 및 개편된 군사역량 목표를 기반으로 재검토한다"고 명시했다. 어쩌면 트럼프 대통령이 가까운 미래에 나토 회원국의 국방비를 5%로 늘리겠다는 목표를 달성하지 못했다고 할 수도 있다.
◇나토내 친우크라, 반우크라 국가들은
트럼프 대통령의 편을 든 국가는 친러 성향의 헝가리, 슬로바키아, 터키 등으로 알려졌다. 빅토르 오르반 헝가리 총리는 24일 "미국 등 일부 국가들이 젤렌스키 대통령을 정상회의에 참석시키고 싶어하지 않았다"고 말했다. 그는 "외교에서 중요한 것은 어디에 있느냐가 아니라 어디에 없느냐"라며 "미국, 터키, 슬로바키아, 그리고 우리(헝가리)는 나토 문제 논의에서 젤렌스키 대통령과 같은 테이블에 앉고 싶지 않다는 점을 분명히 했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헤이그에서 친우크라 성향의 각국 정상과는 개별적으로 만났다. 의장국 네덜란드로부터 무인기와 무인기 격추용 레이더 등 군사 지원을 약속받았고, 영국은 동결된 러시아 자산의 이자 7천만 파운드로 방공 미사일 350기를 제공하겠다고 밝혔다.
정상회의 이후 유럽 주요 정상들은 개별적으로 우크라이나 지지 의사를 표명했다.
메르츠 총리는 "우크라이나 위기가 군사적으로 해결될 수 없다"고 말했고, 스타머 영국 총리는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 휴전에 동의하도록 압박해야 할 때"라고 주장했다.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조르자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등은 "미국이 이란에 대해 행동했듯이, 우크라이나에서도 전쟁을 중단시키기 위해 단호한 행동에 나서야 한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도 "유럽이 러시아와 군비 감축 및 신뢰 회복에 관한 대화를 어떻게 진행할 것인지 지금 생각해야 한다"고도 했다. 강경대처 속 대화 유지 전략이다. 나토 정상회의에서 드러난 각국의 셈법은 이렇게 제각각이었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기자의 다른 기사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