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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럼프 미 대통령이 29일 APEC 정상회담 참석 차 경주에 도착했다. 그는 말레이시아(아세안 정상회의)와 일본, 한국을 방문하는 소위 '아시아 순방' 중이다. 경주에서는 이재명 대통령, 시진핑 중국 국가 주석 등과 정상회담을 갖는 등 꽉 찬 일정을 보낼 것으로 보인다. 그는 러시아를 향해 즉각 휴전을 요구하며 석유 대기업 루코일과 로스네프트를 상대로 집권 2기의 첫 제재 조치를 취하는 등 아시아 순방에 집중할 여건을 마련해 둔 상태다. 전세계 언론의 관심도 경주 미-중 정상회담을 통한 무역 전쟁 진화 여부에 관심이 쏠려 있다.
트럼프 대통령이 김정은 북한 국무위원장과의 만남을 제안하는 등 우크라이나전 종식 문제에 집중하지 않는다고 해서 우크라이나 전쟁이 잦아지는 것은 절대 아니다. 그가 러-우크라 사이를 오가는 '셔틀 중재 외교'가 난항을 겪을 때마다 나오는 게, '우크라이나 전쟁에 관심을 꺼고 내버려두는 방안'이 미국의 마지막 선택으로 거론됐다. 러-우크라와의 정상회담을 통해 어느 쪽의 양보도, 그렇다고 한 쪽을 일방적으로 편들 수도 없는 그에게는 가장 편한 해법이기도 하다.
트럼프 대통령이 시진핑 주석과의 회담에서 중국이 러시아산 에너지 금수 조치에 동의하도록 설득하는 데 실패한다면, 당분간 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한 관심을 거두는 게 유력한 대안이 될 수도 있다고 본다. 시간이 흘러가면 판세가 어느 한쪽으로 기울 테고, 그때 나서도 늦지 않다고 여길 수도 있다.
그렇다면 흘러가는 시간은 누구 편일까?
개인적으로는 예전이나, 지금이나 시간은 여전히 러시아편이다.
우선 전쟁의 판도(전황)가 그렇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29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 중 '포크로프스크의 상황'(Ситуация в Покровске) 코너에서 현지 전황을 추적하는 우크라이나 전쟁 전문 사이트 '딥 스테이트'의 지도를 인용해 "러시아군은 포크로프스크에서 진격을 계속하고 있으며, 외곽의 파블로그라드와 이어지는 주요 도로를 차단했다"고 전했다. 포크로프스크시(市) 일원에서도 러-우크라군 간에 공방이 치열한 소위 '회색 지대'가 도시의 중부와 북부 지역으로 급격히 확대되었다고 했다. 특히 러시아군은 북쪽에서 미르노그라드를 우회해 포크로프스크 남쪽과 북동쪽을 향해 전진했으며, 이 지역의 남북간 회색 지대 사이에는 3㎞도 남지 않았다고 스트라나.ua는 지적했다.

러시아군의 포크로프스크 진입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도 29일 벌어졌다. 포크로프스크의 관문을 뜻하는 도시 경계석(표지석)에 러시아 국기가 펄럭이는 영상이 인터넷에 게재됐는데, 스트라나.ua는 도시의 서쪽 입구로 추정했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지난해(2024년) 여름 방위군 격려차 방문했다가 기념 사진을 찍은 곳이라고 한다.
자존심이 상한 우크라이나군은 이후 드론으로 러시아 국기를 폭파시키는데 성공했다. 스트라나.ua는 이 주변 지역을 현재 누가 통제하고 있는지 알려지지 않았다고 썼다. 다만, 뉘앙스(어감) 등 제반 여건(우크라이나군이 러시아 국기를 직접 제거하지 않고 드론 공격으로 폭파시키는 것/편집자)을 미뤄볼 때 최소한 이 지역은 러시아군의 사정권 하에 들어가 있다고 해야 한다. 또 포크로프스크 서쪽 관문이라면, 동쪽에서 진격한 러시아군이 도시를 가로질러 서쪽까지 거의 진출했다고 보면 된다.


러시아 국기 게양을 보나, 딥 스테이트 지도를 보나, 러시아군의 포크로프스크 포위가 현실이 되고 있다. 푸틴 대통령은 지난 26일 포크로프스크가 포위됐다고 주장했으나,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새빨간 거짓말"이라며 즉각 부인했다. 하지만 객관적인 정황은 러시아 측의 주장에 부합한다고 봐야 하지 않을까 싶다.
더욱이 러시아군은 포크로프스키를 완전히 점령하기 위해 병력을 계속 추가 배치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수백명의 러시아 군인들은 이미 포크로프스크 시내에 들어가 진지를 구축한 뒤 정찰 활동및 방해 공작, 지뢰 설치, 후방 부대(정찰, 반·反드론 전자전, 드론 조종사, 포병및 박격포/편집자)와 교전, 진격 루트 확보 등에 나서고 있다. 또 FPV(개인이 조종하는) 드론을 운용하는 러시아 드론부대는 시내 남부로 진입해 우크라이나의 군수 물자를 파괴하고, 우크라이나군 진지에 대한 공략에 나섰다. 포크로프스크 북부 미르노그라드와 이어지는 군수 물자 수송은 이미 중단됐다고 한다.
스트라나.ua와 영국 텔레그라프 등 일부 외신이 포크로프스크의 함락 위험을 알리기 시작한 것은 지난 7월 말쯤이다. 러시아군은 8월 초 적극적인 공세를 펼쳐 포크로프스크시 경계선까지의 거리를 10km 미만으로 줄였다. 이에 따라 같은 달 19일부터 포크로프스크에서는 아이를 둔 가족들의 강제 대피령이 내려졌고, 하루 15시간 이상의 통금령이 발령됐다. 9월 들어서는 시내 은행이 문을 닫는 등 경제적 활동도 급속도로 위축됐다. 일부 외신에서는 포크로프스크가 9월 중에 함락될 것으로 전망도 나왔다.
하지만 이같은 예측은 빗나갔다. 러시아군이 공격 전술을 바꿨기 때문으로 보인다.
러시아 군사 용병 부대 '바그너 그룹'이 2023년 6월 죄수들로 구성된 부대원들을 소위 고기 분쇄기에 갈아넣듯, 정면 공격을 강행했던 '바흐무트' 공략과 달리, 포크로프스크에서는 소수의 보병을 드론의 엄호 아래 적진으로 침투시키는 새로운 전술을 구사하고 있다. 전차를 앞세운 대규모 병력의 '돌격 앞으로'는 이제 적의 정확한 드론 공격에 희생과 손실만 늘어날 뿐이다. 오히려 오토바이나 말, 사륜구동 차량 등을 이용해 수시로, 빠른 속도로 적진을 향해 달려가는 러시아군의 공격은, 방어에 나선 우크라이나군에게 24시간 숨 돌릴 틈이 없는 대기 상태에 피로감 급증, 공포, 혼돈 등 심리적으로 뒤흔들기에 충분했다. 그렇게 적진이 뚫리면 후방에 대기중인 본대가 전진해 진지를 구축했다. 이같은 전법은 공격 부대의 희생을 줄이는데 기여했지만, 진격 속도는 그만큼 늦어졌다.

러시아군의 전술은 또 포크로프스크 외곽을 폭넓게 포위해 포위망 속에 든 우크라이나군이 스스로 항복하든가, 탈출하도록 만들고 있다.
영국 스카이 뉴스 등은 9월 들어 러시아군의 포크로프스크 포위 가능성을 거론하기 시작했고, 10월에는 러시아군이 포위망 속에 든 포크로프스크 시내로 진입하면서 본격적인 시가전이 시작됐다고 한다. 이후 현지 언론들은 시시각각으로 포크로프스크 전황을 전달하기 시작했다.
전황은 늘 어느 한쪽이 주장하면 다른 쪽은 부인하는 식으로 알려진다. 양측 간의 공방전이 치열할수록 더욱 그렇다. 전쟁 저널리즘(우크라이나전 3년차, 전쟁 저널리즘 이진희 저) 기준으로 보면 어느 한쪽의 주장을 일방적으로 전달하는 것은 위험하다.
포크로프스크 전황으로 시각을 좁히면, 러시아 군사전문 텔레그램 채널들이 특정 지역의 점령 소식을 전하면, 우크라이나 측은 이를 부인하고, 현지 주둔 우크라이나 군인이 SNS를 통해 군지휘부의 부인을 반박하는, 소위 주장→부인→반박하는 흐름으로 이어져 왔다.
급기야는 알렉산드르 시르스키 우크라이나군 총참모장(합참 의장격, 총사령관)이 26일 포크로프스크 전투 부대장들과 긴급 회의를 갖고, "실제 상황에 대한 정보를 왜곡하거나 은폐하는 것은 용납하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전황 왜곡에 따른 댓가는 바로 부대원들의 생명과 직결된다"고 강조했다.
스트라나.ua는 "시르스키 총참모장의 이 경고는 매우 의미심장하다"며 "다른 지역 전선에서는 지휘관들의 거짓 보고를 거론하지 않았다"고 지적했다. 포크로프스크 현장 지휘관들은 문책을 피하기 위해 전황에 대해 거짓말을 하고 있다는 뜻이다.

공방전이 절정으로 치닫자, 러-우크라 양측이 병력을 추가로 포크로프스크 전선에 배치한 것으로 전해졌다.
우크라이나군 정보총국(GUR) 산하 특수부대가 최근 포크로프스크로 배치됐는데, 딥 스테이트는 "전황을 바꾸기 위해서는 여단급 병력의 추가 배치가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이에 맞서 푸틴 대통령도 포크로프스크 지역에 추가 병력을 파견했다고 28일 발표했다.
29일 현재 러-우크라 양국의 공식 발표를 보면, 우선 러시아 국방부는 "포크로프스크에서 기차역과 젤레즈노도로즈니 소구역, 그리고 산업 지대 근처에서 교전이 벌어졌으며, 우크라이나군이 일부 지역에 반격을 가해왔지만, 격퇴됐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측은 포크로프스크 일원을 사수하고 있는 동부군 대변인이 '텔레톤'(합동 군사뉴스 ) 방송에 나와 "러시아군이 시가전이 계속되고 있는 미르노그라드 외곽에 진입했다"면서 "그러나 우크라이나군을 진지를 사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당연하지만(?) 이같은 발표에 (불리한 대목에 대한) 현지 부대의 부인, 일부 군인들의 반박(진실 공방/편집자)으로 이어졌다. 무엇보다도 공방전이 치열하게 벌어지는 전선에서 정확한 정세 파악이 힘든 건 모두가 인정해야 한다.
다만, 독일 일간지 빌트의 군사전문가 율리안 레프케는 "포크로프스크와 미르노그라드가 러시아군에 의해 상당 부분 점령되고, 점점 더 많은 보급로가 러시아군 통제 하에 들어갔으며, 대규모 포위 공격의 위험이 커지고 있는 상황에서 우크라이나 군지도부는 상황의 심각성을 계속 부인하고 있다"고 비판했다.
포크로프스크 공세에 집중하는 러시아군의 1차 군사적 목표는 도네츠크주(州)의 완전 점령이다. 러시아계 인구가 많이 거주하는 돈바스 지역(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은 이미 주민투표를 통해 러시아 연방과 합병했는데, 일부 지역은 여전히 우크라이나 정부의 통제 하에 있다. 러시아군은 특수군사 작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루간스크주는 거의 완전히 점령했고, 도네추크주도 75% 가량 장악한 상태다. 푸틴 대통령이 종전(휴전)의 조건으로 돈바스 지역을 요구한 것도, 도네츠크주에서 아직 장악하지 못한 땅 25%를 굳이 피를 흘리지 않고 점령하기 위해서라고 보면 된다.
협상을 통한 양도가 아니라면, 도네츠크주의 완전 장악을 위해서는 일단 병참 요충지인 포크로프스크를 함락시키는 게 러시아군에게는 긴요하다. 우크라이나군은 포크로프스크를 중심으로 토레츠크(제르진스크), 콘스탄티노프카, 차소프 야르, 그리고 슬라뱐스크-크라마토르스크 지역으로 이어지는 이른바 '요새 벨트'를 구축해 완강히 저항하고 있기 때문이다. 핵심은 역시 도네츠크주 주둔 우크라이나군에게 가장 중요한 공급 허브 역할을 맡고 있는 포크로프스크다.

우크라이나로서는 포크로프스크가 함락된다면 러시아군이 우크라이나의 네 번째로 큰 도시인 드네프르로 진격할 수 있는 길이 열리고, 자칫 수도 키예프(키이우)까지 위태로울 수 있다.
영국 로이터 통신은 올해 2월 분석가들의 인용해 "러시아가 포크로프스크를 점령할 경우, 두 가지 공격 루트를 확보할 수 있을 것"이라고 전했다. 먼저, 서쪽으로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주(州)의 드넓은 평원으로 진군하는 방안이다. "이 지역에는 우크라이나군의 방어 시설 자체가 취약하고, 키예프 방어에 필요한 자연 혹은 도시 장애물이 없다"는 분석이다.
또 다른 루트는 북쪽으로 도네츠크주 산업지대로 진격하는 길이다. "우크라이나가 여전히 통제하는 산업 대도시인 크라마토르스크와 슬라뱐스크에 압력을 가할 수 있다"고 로이터 통신은 전했다.
포크로프스크는 우크라이나에게 경제적으로도 중요하다. 이곳은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큰 코크스(탄소 함유량이 높은 석탄/편집자) 석탄 매장지로, 제철소 운영에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다. 산업단지가 주변에 자리잡고 있는 이유다.
현지 에너지 시장 전문가인 올레그 포펜코는 "이론적으로는 포크로프스크 석탄을 수입 석탄으로 대체하는 것이 가능하지만, 물량과 복잡한 공급망 등을 고려할 때 엄청난 손실이 불가피하다"고 지적했다. 또 다른 자원 전문가는 "포크로프스크 근처에는 리튬 매장량이 풍부하다"며 "포크로프스크 함락은 우크라이나 경제에 단기 및 장기적으로 큰 영향을 미칠 게 분명하다"고 말했다. 러시아군이 이미 1년 전부터 포크로프스크 공격에 나선 또다른 이유이기도 하다.

포크로프스크(구소련 시절인 1962년 크라스노아르메이스크라고 불렸는데, 우크라이나가 2016년 포크로프스크로 개칭했다. 그러나 러시아와 친러 도네츠크인민공화국·DPR은 이를 인정하지 않는다/편집자)는 도네츠크주 주요 철도 및 도로 요충지다. 그래서 러시아군에게 함락되면 도네츠크주 전체의 물류망이 위태로워진다. 또 드네프르 강으로 가는 길이 열린다.
포크로프스크는 돈바스 서부지역의 교통, 광업, 산업, 문화의 중심지라고 할 만하다. 광산및 건설 회사, 내화(耐火)상품 전문업체 디나스 공장, 자동차 기업 '우크르스트로이'등이 위치해 있고, 식품 공장 등이 입주한 농산업 단지도 이 곳에 자리하고 있다.
러시아군의 공세는 프로코프스크에만 국한되지 않는다. 돈바스 지역을 중심으로 북쪽 하르코프(하르키우)주로, 남쪽 자포로제(자포리자)주로도 이어진다.
러시아군은 최근 하르코프주 쿠퍈스크의 시내로 진입했다. 2022년 전쟁 초기, 러시아군에게 넘어갔다가, 우크라이나가 탈환한 도시인데, 다시 러시아 손에 장악될 판이다.
푸틴 대통령은 29일 "쿠퍈스크에서 우크라이나군이 포위됐다"며 "언론인들이 원한다면, 현장에서 직접 확인할 수 있도록 전투를 중단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는 외신 기자는 물론, 러-우크라 언론인들이 원한다면 직접 가서 눈으로 확인해 보라고 권했다.
스트라나.ua는 "푸틴 대통령의 이같은 계획은 그동안 트럼프 대통령에게 설명한 전선 상황(전황)이 얼마나 믿을 수 있는지 객관적으로 입증하기 위한 시도"라고 해석했다. 우크라이나 최전선의 실제 상황을 두고 여러 정보가 트럼프 대통령에게 전해지고 있는데, 이를 객관적으로 보여줄 기회를 갖겠다는 뜻이다. 우크라이나 언론인들은 분명히 이를 거부할 텐데, 이 경우 '우크라이나는 실제 상황에 눈을 감으려고 한다'고 홍보할 게 분명하다고 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는 쿠퍈스크 포위 사실 자체를 부인했다. 우크라이나군 합참 측은 푸틴 대통령의 발언을 "허구이자 환상"이라고 비난했지만, 이 지역에서 격렬한 전투가 진행 중이라는 사실은 확인했다. 딥 스테이트 지도에 따르면 쿠퍈스크가 완전히 포위되지는 않았지만, 러시아군이 도시의 북쪽, 서쪽, 중심부 지역을 통제하고 있다.
지난 주말 러시아 텔레그램 채널들은 이 지역에서 러시아군이 오스콜강 좌안(서쪽)의 마을 쿠릴로프카를 함락시켰다고 보도했다. 마을에 러시아 국기가 올라가는 영상도 공개했다. 러시아군이 이렇게 쿠퍈스크-우즐로바야 전선을 넘어서면 오스콜강 좌안에 있는 우크라이나군 전체를 효과적으로 차단할 수 있다.
딥 스테이트의 보고에 따르면 러시아군은 또 서쪽으로는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주로, 남쪽으로는 자포로제(자포리자)주로 진격을 계속하고 있다.
러시아군의 미사일·드론 공습은 이날도 예외없이 오데사, 드네니프로페트로프스크 주 전력망을 마비시켰다. 이 지역의 철도와 사회 기본 시설이 피해를 입었다.
이에 맞서 우크라이나군 합참도 러시아의 석유 및 가스 처리 시설 3곳을 밤새 파괴했다고 이날 발표했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