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위기를 촉매재로 삼아 한-미 양국의 최고위층에서 벌어지는 카지노 자본주의, 국가 권력이 금융시장의 핵무기 격인 파생상품으로 '잭팟'을 노리는 거대한 음모를 담은 본격 추리 소설 '데칼코마니-신들의 화폐'를 작가의 양해를 얻어 연재한다.
☜이 소설은 한반도 위기를 모티브로 한 가상의 추리 소설이며, 등장 인명·지명·기관·사건 등은 사실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제 15화 도이체방크]에서 계속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
제16화 또 다른 운명]
그를 향한 그리움이 유난히 간절하던 5월의 어느 날. 혜경은 가벼운 등산복 차림으로 지리산을 찾았다. 때마침 아카시아꽃이 만발해 산자락을 하얗게 덮고 있었다. 그녀는 두 손을 활짝 벌려 바람에 흩날리는 아카시아 꽃잎을 잡으려 했다. 동혁이 좋아하던 꽃이었다.
그녀는 아카시아꽃을 두 손 가득 따서, 살포시 눈을 감고 그 향기를 맡았다. 달콤하고 그윽한 향기. 그 향기 속에 오래전 그의 미소가 스며있는 듯했다.
때마침 산들바람이 불어왔다. 그녀는 그 바람에 애절한 마음을 실어 아카시아 꽃잎을 하나씩 날려 보냈다.
‘멍든 가슴, 찢긴 영혼에 이 달콤한 아카시아 향을 불어넣고, 뜨거운 사랑으로 그 아픈 영혼을 꼭 보듬어 주리라.’
무성한 나뭇잎 사이로 햇살이 부서져 내렸다. 그녀는 그 빛을 가슴 가득 품었다.
청량한 바람이 불어오자, 무겁게 가라앉아 있던 마음도 조금은 가벼워지는 듯했다.
아픈 가슴을 겨우 달래고 돌아온 어느 휴일.
그녀는 늦도록 책을 읽다가 문득 동혁을 떠올렸다.
처음 그를 만난 날. 심장이 요동치던 강렬한 첫사랑의 순간. 그리고 시리고도 아픈 기억들.
오늘도 아무도 없는 방 안에서 혼자 그의 이름을 불러 보다가, 그녀는 가만히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펜을 들었다.
어둠이 깊고, 길이 끊겨도 너를 향한 발걸음은 멈추지 않을 거야.
괜찮다고 말할게.이제는 혼자가 아니라고.
다시 일어나는 법을 몰라도 괜찮아.
그냥 기대면 돼. 내가 버티고 있으니까.
사랑은 잡지 않는 게 아니라 끝까지 놓지 않는 거니까.
펜을 내려놓은 혜경은 책상 위에 놓인 작은 유리병을 열었다. 그 안에는 지리산에서 따 온 아카시아꽃이 담겨 있었다. 그녀는 그가 좋아하던 그 향기에 기대어, 아련한 첫사랑의 추억으로 잠들었다.
기약 없는 이별은 그렇게 계속되고 있었다.
아카시아 피는 봄날도, 그렇게 또 하루가 지나가고 있었다.
얼마 전부터였다.
혜경이 근무하는 신문사 근처 공중전화에서, 누군가 조심스럽게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전화벨이 울렸다.
“예, 안혜경입니다.”
그러나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 말도 들려오지 않았다.
“여보세요. 여보세요?”
혜경이 고개를 갸웃했다.
옆자리의 진희가 장난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누구였어요?”
“모르겠어요. 아무 말도 안 하네요.”
진희가 웃으며 말했다.
“남자 목소리 같던데요? 어제 그 사람 아닌가? 또 누가 짝사랑하는 거 아니에요?”
혜경은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 전화의 주인은 동혁이었다.
출소한 뒤, 그가 제일 먼저 확인한 것은 혜경의 연락처였다.
몇 차례나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그녀의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는 차마 말을 잇지 못했다. 그저 숨만 삼킨 채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오늘은 달랐다. 혜경을 보고 싶은 마음이 너무 간절했다. 그녀가 근무하는 신문사 근처까지 찾아왔다.
잠시 후, 아카시아 빛 투피스를 입은 혜경이 건물 밖으로 걸어 나왔다. 그는 황급히 전화박스 뒤로 몸을 숨겼다. 그리고 멀어지는 그녀의 뒷모습을 훔쳐보았다.
정말 단 한 번만. 딱 한 번만이라도 그녀를 보고 싶었다. 그런데 막상 눈앞에 그녀가 나타나자, 그는 한 발짝도 나아갈 수 없었다.
길가의 레코드 가게에서 노래가 울려 나왔다. 가수 임재범의 목소리였다.
감히 제가 그녀를 사랑합니다. 그 한 구절이 그의 발목을 붙잡았다. 그는 발걸음을 떼지 못했다.
곧이어 임재범의 또 다른 노래, 〈낙인〉이 흘러나왔다.
지워지지 않는 상처가 괴롭다. 어찌 너를 잊을까…
그 순간, 그는 무너졌다. 털썩 화단 앞에 주저앉았다. 두 손으로 머리를 감싸 쥔 채 어깨를 들썩였다.
끝내 지워지지 않는 한 사람, 잊으려 해도 잊을 수 없는 사랑이 바로 눈앞에 있었다.
하지만 그에게 사랑은 죄였다.
세월은 어느덧 10년.
짧은 만남. 한없는 사랑. 그리고 끝없는 이별.
세월이 흐를수록 그의 그리움은 옅어지지 않았다.
오히려 더 깊어지고 있었다.
눈부신 아침 햇살이 창가를 넘어오던 어느 날 늦잠을 자고 있던 혜경의 휴대전화가 울렸다. 창근이었다.
두 사람은 조용한 찻집에서 마주 앉았다.
창근이 어색한 웃음을 지으며 먼저 말을 꺼냈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지? 우리가 만난 지… 얼마나 됐나?”
혜경은 담담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다.
“그땐 정말 미안했어. 그런데 오늘은 왜 보자고 한 거야?”
창근은 잠시 찻잔을 바라보다가 조심스럽게 말했다.
“그냥 지나는 길에, 차 한잔하려고.”
그녀의 눈치를 살피듯 말을 이었다.
“그 친구… 아직 못 찾았지?”
그 한마디에 혜경의 눈빛이 금세 젖어 들었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를 저었다.
창근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혹시 그 친구를 만났는데, 네가 생각한 모습이 아니면 어떻게 할 거야? 아니, 널 거부하면… 더 큰 상처가 될지도 몰라.”
혜경은 가만히 그를 응시했다. 창근이 다시 말했다.
“지난번 내가 뭐라고 했는지 기억해? 네가 슬퍼하는 모습은 도저히 볼 수 없다고. 네가 원하는 건 뭐든 다 해 주겠다고.”
혜경의 눈빛이 흔들렸다.
“기억하고 있어. 정말 고마워. 그런데…”
그녀는 눈을 감았다가 다시 떴다. 눈빛이 달라져 있었다.
“알아낸 게 있지? 그렇지? 빨리 말해 줘. 제발… 지금 빨리.”
그녀의 숨이 가빠졌다. 창근은 단단히 다짐을 받으려는 듯 말했다.
“먼저 약속해 줘. 어떤 일이 있어도 상처받지 않겠다고. 슬퍼하지 않겠다고.”
혜경은 고개를 저었다.
“그가 살아 있기만 하면 돼. 그냥 한 번만 볼 수 있으면… 난 괜찮아. 그러니까 어서 말해 줘.”
그녀의 얼굴은 간절함으로 물들어 있었다. 창근은 잠시 침묵하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는 잘 있어. 건강해.”
“오… 하느님.”
혜경은 붉어진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았다.
“정말 감사합니다.”
창근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덧붙였다.
“이번 토요일, 궁전호텔 스카이라운지에서 그를 만나봐.”
혜경의 눈이 커졌다.
“정말?”
그녀는 믿기지 않는다는 듯 창근을 바라보았다.
“넌, 넌… 내 수호신 같아. 고마워.”
혜경은 그대로 창근을 와락 끌어안았다.
토요일 저녁. 궁전호텔 스카이라운지 창가.
혜경은 설레는 마음을 감추지 못한 채 앉아 있었다.
그녀의 눈은 출입문 쪽으로만 향해 있었다.
마침내 문이 열렸다.
요즘 가장 빛나는 영화배우 강정연이 미소 띤 얼굴로 천천히 들어왔다. 그리고 그녀의 옆에 한 남자가 있었다.
전동혁이었다.
그는 단정함 그 자체였다. 머리카락 한 올 흐트러지지 않은 이마. 단단한 턱선. 조각칼로 새긴 듯한 코와 입매. 회색빛 슈트는 그의 넓은 어깨에 완벽히 맞아 있었다. 와이셔츠의 단추 하나까지 흐트러짐이 없었다.
그가 걸을 때마다 공기의 흐름이 바뀌는 듯했다.
그가 지나가는 순간, 주변에는 짧은 정적이 흘렀다.
눈빛은 매혹적이면서도 냉철했다. 그 안에는 연민과 고독이 함께 머물러 있었다.
그녀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던 동혁과는 너무나 달랐다. 혜경은 숨이 턱 막혔다. 세상이 멎어 버린 듯했다.
모든 소리도 사라졌다.
오직 눈앞의 그와, 그의 곁에 선 여배우만이 선명했다.
혜경의 하얀 손가락이 가늘게 떨렸다.
창근이 먼저 자리에서 일어나 악수를 청했다. 동혁은 자신에게 고정된 혜경의 시선을 애써 외면한 채, 어색한 웃음을 지었다. 정연도 환하게 웃으며 창근과 악수했다.
“혜경 씨죠? 여전히 아름다우시네요.”
정연은 오래전, 눈부셨던 혜경을 아직도 또렷이 기억하고 있었다.
하지만 혜경은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애써 웃으려 했지만, 입술은 슬픔의 무게를 견디지 못하고 무너졌다. 커피잔을 잡은 그녀의 손가락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창근은 말문이 막힌 그녀를 살피며 조용히 등을 토닥여 주었다.
동혁이 먼저 입을 열었다.
“…오랜만이다. 잘… 지냈지?”
영혼 없는 그 한마디. 그 말은 혜경의 가슴을 찌르는 예리한 비수였다.
잘 지냈느냐는 말. 그 한마디로 사람이 이렇게 멀어질 수 있다는 것을, 그녀는 그날 처음 알았다.
세상의 어떤 말로 고개 숙인 그녀를 위로할 수 있을까.
동혁은 잔인한 그 한마디를 던져 놓고, 이내 어색한 웃음만 지을 수밖에 없었다. 그저 난감한 상황이었다.
혜경은 고개를 돌렸다. 창밖을 바라보며 야속함을 달래려 했지만, 눈물로 가려진 시야에는 아무 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들의 아픈 사랑의 결말을 예고하는 듯, 가수 이승철의 〈서쪽 하늘〉이 흐르기 시작했다.
이젠 슬픔이 되어 버린 그대를 다신 부를 순 없을 것 같아…
그 선율은 그녀의 멍든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그녀는 입술을 깨물며 참으려 했다. 하지만 눈치 없는 눈물은 하염없이 흘러내렸다.
그 순간, 그녀는 그를 붙잡고 마구 원망하고 싶었다.
왜 그랬느냐고? 왜 나를 버렸느냐고?
왜 이제야 이렇게 나타났느냐고?
그러나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차라리 무릎을 꿇고, 마구 울부짖고 싶었다.
다시는 이러지 말라고. 제발 이렇게 끝내지 말라고.
그렇게라도 애원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녀는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음악이 바뀌었다.
멜라니 사프카(Melanie Safka)의 〈The Saddest Thing(가장 슬픈 일)〉이었다.
태양 아래 가장 슬픈 일은 말 없는 작별입니다.
애절한 노랫말은 비탄에 젖은 그녀의 가슴을 더욱 아프게 했다.
어색한 침묵이 오랫동안 흘렀다.
정연이 분위기를 바꾸려는 듯 혜경에게 말을 건넸다.
“말씀 많이 들었습니다. 기자로서 활약도 대단하시다고요. 정말 반가워요.”
혜경은 고개를 들지 않았다. 이 냉엄한 현실을 마주할 용기가 나지 않았다. 그때 웨이터가 다가와 와인을 따랐다.
혜경은 조금 진정된 듯, 작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합니다.”
또다시 어색한 침묵이 흘렀다. 입술과 혀가 말라 버린 그녀는 와인잔을 들어 한 모금 마셨다. 그때 창근이 그녀의 마음을 진정시키려 한마디 던졌다.
“자, 만남을 자축하는 의미에서 건배합시다.”
순간 그녀의 눈썹이 꿈틀했다.
‘아니, 이 상황에서 자축은 뭐고, 또 건배라니.’
그녀는 단숨에 와인을 들이켜더니, 돌연 창근의 어깨를 마구 두드렸다.
“아얏! 미안해!”
창근은 자신의 실수를 깨닫고 당황했다.
어쩔 줄 몰라 쩔쩔매는 그를 보던 혜경은 그만 피식 웃고 말았다. 그 덕분에 침울한 분위기는 오히려 조금 가라앉았다.
그날, 그 자리에서 그녀에게 강요된 것은, 오직 체념과 포기였다. 그녀도 이젠, 참담한 현실을 받아들이려 했다. 그녀가 조금 진정된 듯 보이자, 창근은 정연에게 눈짓을 보냈다.
정연은 기다렸다는 듯 자리에서 일어나 그를 따라나섰다.
남겨진 두 사람은 한참 동안 서로를 바라보지 못했다.
혜경은 고개를 떨군 채 자신의 손끝만 바라보고 있었다.동혁은 창밖의 어둠에 시선을 묶어 두고 있었다.
숨소리조차 조심스러울 만큼, 방 안의 공기는 무겁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윽고 혜경이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붉어진 눈가에는 아직도 눈물이 맺혀 있었다.
“네가 무너졌다고… 그 오랜 세월, 난 그렇게 아파했는데…”
그녀는 그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다시 찬찬히 살펴보았다. 입술이 떨렸다.
“알고 보니 넌 천국에 있었고, 나만 지옥에 있었구나.”
동혁의 얼굴이 굳어졌다.
혜경은 믿을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니야. 이건 현실이 아니야. 우린 지금 영화를 찍고 있는 거야. 그렇지?”
그녀는 끝내 무너지고 말았다.
“말해 봐. 도대체… 너희 둘, 어떤 사이야?”
말 없는 동혁의 시선은 허공을 떠돌고 있었다.
“도대체 내게 왜 이러는 거야. 왜?!!!”
그 말은 더 이상 질문이 아니었다. 입술 사이로 피처럼 터져 나온 절망이었다.
한없는 고독. 애타던 그리움. 오래 눌러 온 슬픔.
그 어떤 아픔 앞에서도 애써 삼켜 왔던 울음이 끝내 터지고 말았다.
한참을 울던 혜경은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들어 가만히 그를 바라보았다.
“건강하게 지내는 걸 보니… 기뻐. 분명 기쁜데… 왜 이렇게 아픈 거야. 왜?”
그녀의 간절한 마음 앞에서 동혁은 고개만 숙이고 있었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동혁아, 넌 내 전부였어. 내가 널 얼마나 찾았는데… 그런데 이제 난 어떻게 살아야 해?”
그녀의 눈물은 끝도 없이 흘러내렸다.
“동혁아. 제발 말 좀 해 줘. 아무 말이라도 좋아.”
혜경은 절절하게 애원하며 그를 바라보았다.
그제야 동혁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미안해.”
그는 단 한마디만 던져 놓고 고개를 돌려 버렸다.
혜경은 목이 잠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십 년 전, 그 어쩔 수 없었다던 너의 숙명. 난 그걸 애써 부정하며 십 년을 버텼어. 오직 너만 생각하며 아파하는 동안, 내 청춘은 다 흘러가 버렸어. 아니, 흘러간 게 아니라… 무너져 버렸어. 모두.”
그것은 단순한 원망이 아니었다. 절망이었다.
동혁은 고개를 숙인 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혜경은 시선을 거두고 창밖을 바라보았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를 만나면 꼭 묻고 싶은 말들이 수없이 많았다.
하지만 막상 그 순간이 오자, 그 어느 것도 꺼낼 수가 없었다.
왜 떠났을까. 왜 나만 혼자 남겨 두고 떠났을까. 왜 끝내 나를 밀어내야만 했을까.
수없이 되뇌어 왔던 말들이 그 순간 전부 흩어졌다.
음악이 또 바뀌었다.
임재범의 〈너를 위해〉가 흘러 나왔다.
그건 아마 전쟁 같은 사랑. 난 위험하니까 사랑하니까
너에게서 떠나줄 거야.
임재범은 그가 하고 싶은 말을 그대로 노래로 말해주고 있었다. 그때 그는 마치 독백처럼 단 한마디를 흘렸다.
“널 위해…….”
혜경은 잘못 들은 듯 그를 바라보았다.
“응?”
동혁은 다시 중얼거렸다.
“난 널 떠나야만 널 지킬 수 있는 사람이야. 너를 사랑하면 안 되는 사람… 난.”
말을 잇지 못한 그의 눈에서 참았던 눈물이 번졌다.
혜경은 그의 손을 꼭 잡았다.
“난 아무것도 필요 없어. 오직 너만 있으면 돼.”
동혁은 그녀의 손을 천천히 뿌리쳤다. 그리고 고개를 돌렸다.
또다시 절망한 혜경은 이제 체념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그녀는 손수건을 꺼내 눈물로 얼룩진 그의 얼굴을 천천히 닦아 주었다. 그리고 이별을 예감한 사람처럼, 그를 꼭 감싸 안았다.
그녀의 몸에서 은은한 아카시아 향이 번졌다. 그 향기가 동혁을 감싸자, 그의 어깨가 들썩였다. 혜경은 그의 등을 천천히 다독이며 속삭였다.
“동혁아, 이제 한마디만 해 줘. 사랑한다는 그 한마디만. 아니, 사랑했다는 말이라도 좋아. 그 한마디로 난 살아갈 거야. 부탁이야…”
애절한 첫사랑의 마지막 순간이었다.
마침내 동혁이 입을 열었다.
“미치도록 사랑해.”
그의 목소리가 떨렸다.
“넌 나의 전부야…”
그 말이 터져 나오자, 세상은 숨을 삼킨 듯 멈춰 섰다.
빛도, 시간도, 울음도, 숨소리도 사라졌다.
그는 애써 감추었던 사랑을 끝내 쏟아 내고 말았다.
동혁은 그녀의 손을 잡아 자신의 얼굴로 가져갔다.
그의 눈물이 그녀의 손등 위로 떨어졌다. 그 뜨거운 눈물이 혜경의 가슴 깊이 저며 왔다.
이제 그들 사이에 말은 더 이상 필요 없었다.
오직 사랑.
그 하나면 모든 것을 견뎌낼 수 있을 것 같았다.
‘오랜 그리움, 끝내 엇갈린 사랑… 이 모든 것을 기꺼이 감내하리라.’
혜경은 눈을 감은 채 그를 끌어안았다. 그를 놓지 않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이제는 놓아야 한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마지막 남은 사랑의 온기까지 모두 건네려는 듯, 그의 어깨를 천천히 다독였다.
그때 창근과 정연, 두 사람이 다시 들어왔다.
동혁의 마음을 확인한 혜경은 흘러내린 눈물을 천천히 닦아 냈다. 그리고 다시 평온한 얼굴로 돌아가려 애썼다. 그녀는 정연을 바라보며 조심스럽게 말했다.
“주제넘지만, 동혁 씨를 잘 돌보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더구나 오늘 만남을 배려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혜경은 평소의 모습을 되찾고 있었다. 정연은 부드럽게 미소 지었다.
“오히려 제가 감사한걸요. 예쁜 혜경 씨와 멋진 창근 씨를 함께 뵙게 되어 정말 영광이에요.”
혜경은 잠시 망설이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앞으로도 가끔 이렇게 함께 뵐 수 있을까요?”
정연은 기다렸다는 듯 대답했다.
“좋은 생각이에요. 한 달에 한 번? 매주 마지막 금요일, 여기에서요.”
혜경은 고개를 숙였다.
“정말 감사합니다. 고맙습니다.”
그녀가 동혁을 바라보자, 그도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가슴이 찢어져도. 바라만 보는 사랑이라도. 그가 살아 있고, 다시 볼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혜경은 안도하고 있었다. 그 애잔한 마음을 동혁도 알고 있는 듯했다. 그의 애절한 눈빛이 말을 대신하고 있었다.
며칠 후.
동혁은 꽤 호화롭게 꾸며진 거실의 식탁에서 혼자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안방 문이 열리며, 세련된 옷차림으로 외출 준비를 마친 정연이 나왔다.
“오늘 촬영 때문에 늦을 거예요. 저녁 잘 챙겨 드세요.”
동혁은 자리에서 일어나 현관까지 따라 나왔다.
“걱정하지 말고 잘 다녀와요.”
그는 손을 흔들며 그녀를 배웅했다.
며칠 전 혜경을 만난 뒤로도, 그의 가슴은 여전히 시리고 마음은 무거웠다.
‘잊자. 잊어야 한다.’
동혁은 머리를 흔들며 마음을 다잡았다.
호화로운 소파에 몸을 묻고 TV를 켰다.
출소한 후 그의 일상은 늘 비슷했다. 가끔 지리산 고향 마을을 찾아가 부모님의 명복과 혜경의 행복을 위해 기도했다. 밤하늘의 별과 반딧불이를 벗 삼아 마음을 달래기도 했다.
지리산에 가지 않는 날이면 황금순 할머니를 찾아가거나, 우주와 지구, 문명과 전쟁을 다룬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이 그의 유일한 낙이었다.
그러나 그는 아직 알지 못했다.
그들의 아픈 사랑은 반딧불이가 빛을 품기까지 깊은 어둠을 견디듯, 곧 위대한 역사의 반전을 불러올 운명의 불씨가 되리라는 것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