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스토옙스키는 안다. 그런데 그의 아내 안나 도스토옙스카야를 아는 사람은 많지 않다. 『죄와 벌』, 『백치』, 『악령』,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 뒤에는 러시아 문학을 넘어 세계문학의 고전이 된 작품들이 줄줄이 따라붙는다. 그러나 그 작품들이 쓰이던 방의 다른 한쪽에는 원고를 받아 적고, 돈을 계산하고, 출판사와 협상하고, 빚을 정리하고, 책을 팔던 한 여자가 있었다.
그 여자가 안나 그리고리예브나 도스토옙스카야다. 남편이 죽은 뒤에는 그의 원고와 편지, 유품까지 모아 보존했고, 도스토옙스키라는 이름이 다음 세대까지 살아남도록 자신의 남은 생을 바쳤다. 러시아력으로 1846년 8월 30일, 현재 달력으로 9월 11일 태어난 안나는 올해 탄생 180년을 맞았다.
러시아과학재단이 올해 시작한 안나 도스토옙스카야 연구 프로젝트에서 열거한 그녀의 역할만 해도 적지 않다. 속기사, 필사자, 공동 작업자, 최초의 독자이자 비평가, 개인 비서, 회계 담당자, 기록보존자, 편집자, 출판인, 서적 판매자, 전기 작가, 회고록 저자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대문호의 아내’라는 말 하나로는 설명하기 어려운 삶이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것은 1866년 10월이었다. 당시 도스토옙스키는 45세, 안나는 스무 살이었다. 이때 도스토옙스키는 낭만적인 사랑을 기다릴 형편이 아니었다. 그에게 당장 필요한 사람은 아내가 아니라 속기사였다.
빚에 몰린 도스토옙스키는 출판업자 표도르 스텔롭스키와 위험한 계약을 맺어놓은 상태였다. 1866년 11월 1일까지 새로운 소설을 넘기지 못하면 향후 몇 년 동안 자신의 작품에 대한 출판권을 빼앗길 수 있는 조건이었다. 그런데 그는 동시에 『죄와 벌』을 집필하고 있었다. 시간은 없었고, 새로운 소설 한 편을 거의 한 달 안에 만들어야 했다.

이때 속기술을 배운 젊은 안나 스니트키나가 그의 집으로 찾아왔다. 도스토옙스키가 이야기를 말하면 안나는 빠른 속기로 받아 적었고, 이후 원고로 정리했다. 10월 초부터 말까지 이어진 집중적인 작업 끝에 한 편의 소설이 완성됐다. 그 작품이 바로 『도박꾼』이다.
생각해보면 두 사람의 관계는 처음부터 문학으로 시작됐다. 남자는 소설을 말했고 여자는 그것을 글자로 옮겼다. 한 사람에게 문학은 머릿속에서 폭발하는 이야기였고, 다른 한 사람에게 문학은 그 이야기를 정해진 시간 안에 종이 위에 붙잡아 놓는 일이었다. 『도박꾼』이 완성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도스토옙스키는 안나에게 청혼했고 두 사람은 이듬해 결혼한다.
그러나 결혼했다고 문제가 끝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이제부터가 시작이었다. 우리가 도스토옙스키를 생각할 때 흔히 떠올리는 것은 인간의 죄와 구원, 신과 자유, 선과 악이다. 하지만 실제 그의 생활을 지배했던 또 하나의 단어는 ‘돈’이었다. 도스토옙스키는 오랫동안 빚에 쫓겼다. 잡지를 창간했다가 실패했고 가족이 남긴 채무까지 떠안았다. 여기에 룰렛에 대한 집착도 있었다. 결혼 후 유럽에 머물던 시절에도 그는 도박장에서 돈을 잃었고, 생활은 끊임없이 불안정했다.
안나는 그런 남편의 옆에서 단순히 위로하는 아내로 머물지 않았다. 오히려 생활의 실무를 하나씩 자기 손에 가져왔다. 가계를 정리하고 채무를 관리했으며, 원고와 계약을 챙기고 책이 얼마나 팔렸는지를 계산했다. 도스토옙스키가 문학의 세계에 들어가 있을 때 현실의 세계가 무너지지 않도록 붙들고 있었던 사람이 안나였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문학기념박물관에는 지금도 안나의 방이 따로 복원돼 있다. 흥미로운 것은 박물관이 이 공간을 단순히 ‘작가 부인의 방’으로 설명하지 않는다는 점이다. 공식 설명에는 ‘사업하는 여성의 서재’라는 표현이 등장한다. 안나는 도스토옙스키의 비서와 속기사였을 뿐 아니라 작품 출판과 서적 판매, 집안의 금전 업무까지 담당했다.
여기서 안나가 도스토옙스키 문학에서 왜 중요한지가 보인다. 그녀가 남편의 소설을 대신 써준 것은 아니다. 『백치』의 미시킨도, 『악령』의 스타브로긴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의 이반과 알료샤도 도스토옙스키가 만들어낸 인물이다. 그러나 작가에게 작품을 쓸 시간과 조건을 만들어주는 일은 전혀 다른 문제다. 집세가 얼마인지, 원고료가 언제 들어오는지, 빚을 누구에게 먼저 갚아야 하는지, 책을 어느 서점에 몇 부 보낼 것인지까지 작가가 모두 신경 써야 한다면 창작에 사용할 시간은 줄어들 수밖에 없다. 안나는 바로 그 현실의 영역을 담당했다. 문학은 책상 위에서만 만들어지는 것이 아니다. 생활이 무너지면 책상도 사라진다.
안나의 역할은 시간이 지나면서 더욱 커졌다. 1870년대 들어 도스토옙스키 부부는 기존 출판업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는 대신 자신의 작품을 직접 출판하고 판매하는 방식을 확대했다. 책을 직접 찍고, 서점에 보내고, 판매량을 확인하고, 독자들의 주문까지 관리해야 했다. 그 과정에서 실무를 맡은 사람이 안나였다. 그녀의 역할을 단순한 ‘내조’라고 부르기 어려운 이유도 여기에 있다. 오늘날 식으로 표현한다면 작가의 매니저이면서 편집자였고, 출판사 대표이면서 재무담당자였으며, 저작권 관리자와 판매책임자의 역할까지 했다. 도스토옙스키라는 작가를 하나의 독립적인 출판 브랜드로 운영한 사람이었다고 표현해도 크게 틀리지 않는다.
도스토옙스키가 죽기 직전 완성한 마지막 장편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은 안나에게 헌정됐다. 두 사람이 처음 만났던 1866년 이후 안나는 약 14년 동안 그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작품이 탄생하는 과정을 지켜봤다. 작가는 원고를 썼고, 안나는 그 원고가 책이 되고 그 책이 독자에게 도착하는 과정을 책임졌다. 그렇다면 이런 질문을 해볼 수 있다. 안나가 없었다면 도스토옙스키가 위대한 작가가 되지 못했을까. 그렇게까지 말하는 것은 지나치다. 안나를 만나기 전에 이미 그는 『가난한 사람들』과 『죽음의 집의 기록』을 썼고 『죄와 벌』 역시 상당 부분 집필하고 있었다.
그러나 우리가 지금 알고 있는 후기의 도스토옙스키를 생각하면 이야기는 조금 달라진다. 안나와 결혼한 이후 그는 『백치』, 『악령』, 『미성년』,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남겼다. 그의 문학 세계가 가장 깊어지고 거대해진 시기와 두 사람의 결혼생활이 상당 부분 겹친다. 안나가 작품의 사상을 만든 것은 아니지만, 그 사상이 작품이 될 수 있도록 현실을 관리했다.
1881년 도스토옙스키가 세상을 떠났다. 안나는 불과 서른네 살이었다. 보통의 전기라면 여기에서 ‘위대한 작가와 그의 아내’ 이야기는 끝날 수도 있다. 그러나 안나라는 인물의 진짜 중요성은 오히려 이때부터 더 분명해진다. 안나는 이후 37년을 더 살았다. 그리고 그 시간의 상당 부분을 도스토옙스키의 작품과 기록을 보존하는 데 사용했다. 작품을 다시 출판하고 교정했으며, 원고와 편지, 사진과 유품을 모았다. 남편이 살아 있을 때는 그의 생활을 관리했다면, 남편이 죽은 뒤에는 그의 기억을 관리하기 시작한 것이다.
1883년에는 도스토옙스키 최초의 전집 출판을 조직했고, 이후 그의 생애와 작품에 관한 방대한 자료를 정리했다. 자신이 남겨두었던 속기일기를 해독하고 회고록을 집필하는 일도 계속했다. 오늘날 도스토옙스키 연구자들이 사용하는 자료 가운데 상당 부분은 안나가 버리지 않고 모으고 분류했기 때문에 남을 수 있었다.
1901년 모스크바 역사박물관에는 그녀가 수집한 자료를 토대로 ‘도스토옙스키의 방’이 만들어졌다. 러시아 국립문학박물관이 보유한 도스토옙스키 관련 컬렉션에서도 안나가 모은 자료는 핵심을 이룬다. 1916년 촬영된 사진을 보면 노년의 안나가 바로 그 ‘도스토옙스키의 방’에 앉아 있다. 젊은 시절 남편의 말을 속기로 받아 적었던 여자가 반세기 뒤에는 도스토옙스키의 기억을 지키는 사람이 돼 있었다.
우리가 오늘 도스토옙스키의 삶을 비교적 세밀하게 들여다볼 수 있는 이유 가운데 하나도 여기에 있다. 작가가 작품을 남겼다면 안나는 작가의 흔적을 남겼다. 작품만 남겨진 것이 아니라 편지와 사진, 원고와 유품, 그가 살았던 삶의 모습까지 후대에 전해질 수 있도록 만들었다.

2026년 러시아에서 안나 도스토옙스카야가 다시 주목받는 것도 이 때문이다. 러시아과학재단은 그녀의 탄생 180주년을 계기로 새로운 서신과 기록을 조사하고 본격적인 학술 전기를 만드는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도스토옙스키 박물관에서도 안나와 도스토옙스키의 관계, 그녀가 남편의 원고와 출판, 빚과 기록을 어떻게 관리했는지를 다시 살펴보는 행사가 마련됐다. 문학사는 대개 작가 한 사람의 이름을 기억한다. 책 표지에도 한 사람의 이름이 찍힌다. 하지만 한 권의 책이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보이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원고를 읽어주는 사람, 시간을 만들어주는 사람, 생활을 책임지는 사람, 그리고 작가가 죽은 뒤 그의 원고를 버리지 않고 간직하는 사람이다.
도스토옙스키에게 그 사람이 안나였다. 그래서 그녀를 단순히 ‘도스토옙스키의 아내’라고 부르면 뭔가 중요한 것이 빠진다. 그녀는 그의 아내였고 가장 가까운 독자였으며, 속기사였고 출판인이었고 기록보존자였다. 도스토옙스키라는 작가의 창작과 생활, 그리고 사후의 기억까지 가장 오랫동안 지켜본 사람이었다.
도스토옙스키가 인간의 내면을 파고들었다면 안나는 그 도스토옙스키가 글을 계속 쓸 수 있도록 현실을 붙들었다. 그리고 남편이 세상을 떠난 뒤에는 그가 사라지지 않도록 다시 한번 붙들었다. 작가는 작품을 남겼다. 안나는 그 작품이 살아남을 시간을 만들었다.
최승현 에디터 buyrussia21@gma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