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반도 위기를 촉매재로 삼아 한-미 양국의 최고위층에서 벌어지는 카지노 자본주의, 국가 권력이 금융시장의 핵무기 격인 파생상품으로 '잭팟'을 노리는 거대한 음모를 담은 본격 추리 소설 '데칼코마니-신들의 화폐'를 작가의 양해를 얻어 연재한다.
☜이 소설은 한반도 위기를 모티브로 한 가상의 추리 소설이며, 등장 인명·지명·기관·사건 등은 사실과 전혀 관계가 없습니다.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제19화 쌈짓돈의 복수]에서 계속
[데칼코마니 신들의 화폐 –
제20화 또 다른 작별]
어느 날, 혜경과 창근, 그리고 동혁은 늘 만나던 스카이라운지에서 정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창밖으로 내려다보이는 한강의 물결 위에 도시의 불빛이 반짝이고 있었다. 서울의 밤은 여전히 화려했다.
잠시 후, 정연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곧장 동혁의 옆자리로 다가와 털썩 주저앉았다. 그녀의 얼굴에는 이미 취기가 번져 있었다.
“늦어서 미안해. 오늘 드라마 쫑파티 했어. 우리 마음껏 마시자.”
정연은 앉자마자 잔을 들었다. 그리고 연거푸 건배를 제안했다. 웃음도 지나쳤다. 그래서 오히려 불안해 보였다. 그녀의 잔은 너무 쉽게 비워졌다.
그래서였을까. 그녀의 마음은 더 빨리 무너져 갔다. 정연이 갑자기 술잔을 내려놓으며 느닷없이 따지듯이 말했다.
“우리 모임이 벌써 10년이 됐어. 도대체 그 Some Day는 언제 오는 거야?”
그녀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모두가 당황했다. 창근은 애써 농담으로 분위기를 돌리려 했다.
“바로 오늘이지. 이렇게 좋은 장소에서 멋진 야경을 보면서, 이 멋진 사람들과 맛있는 식사를 할 수 있는 날. 그게 바로 Some Day 아니겠어?”
하지만 정연은 웃지 않았다. 그녀의 눈빛은 무겁게 내려앉았다.
그때까지 네 사람의 엇갈린 애정은 위태로운 평형을 유지하고 있었다.
사랑. 결혼.
그 단어들은 오래전부터 그들 사이에서 봉인된 말들이었다. 그러나 그날, 정연은 혼자 그 봉인을 풀고 있었다.
창근이 조심스럽게 그녀를 제지하려 했다. 그녀는 멈추지 않았다.
“Some Day엔… 결국 우린 이렇게 되는 건가?”
정연은 몸을 돌려 옆자리의 동혁을 바라보며 손가락으로 X자를 그렸다. 이별을 예고하는 손짓이었다.
“대신 둘은 결국 이렇게 되는 거야?”
이번에는 앞자리의 혜경과 동혁을 번갈아 보며 엄지와 검지를 맞대었다. 두 사람을 하나로 묶는, 노골적인 제스처였다.
동혁이 난감한 얼굴로 그녀의 어깨를 가볍게 두드렸다.
“오늘 술이 좀 지나친 것 같아.”
정연은 그의 손을 매정하게 뿌리쳤다. 한동안 그를 바라보던 그녀가 불현듯 서글프게 웃었다.
“그럼 이렇게는?”
이번에는 창근과 자신을 가리키며 손가락을 맞댔다. 세 사람은 놀란 눈빛으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정연이 다시 잔을 들어 올렸다.
“자, 건배. 그 Some Day를 위하여.”
그 서늘한 눈빛에 압도된 세 사람은 반사적으로 잔을 들었다. 와인이 다시 채워지던 순간, 휘트니 휴스턴의 노래 〈I Have Nothing〉이 흘러나왔다.
날 떠나지 말아요… 난 아무것도 가진 게 없어요…
절박한 애원. 절절한 고백을 담은 그 노래가 흐르는 동안, 정연은 서서히 무너졌다. 그녀의 눈가에 눈물이 번졌다. 힘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어 갔다.
“난 세상에 홀로 남은 고아였어.”
술잔을 쥔 그녀의 손끝이 떨렸다.
“부모님도, 할머니도 차례로 떠난 뒤에 남은 건 고독과 절망뿐이었지. 그때 동혁을 만났어.”
정연은 천천히 얼굴을 들어 동혁을 바라보았다.
“우리는 서로를 붙잡으며 겨우 버텼어. 남매처럼, 친구처럼….”
그녀의 목소리는 흔들렸고, 눈동자에는 깊은 슬픔이 잠겨 있었다.
“곧 동혁이는 내 전부가 되었어. 이런 얘기, 처음 듣지?”
동혁은 말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혜경의 눈빛도 촉촉하게 젖어 있었다.
정연이 혜경을 바라보며 말했다.
“혜경아… 난 너를 좋아해. 창근의 아픔도 알고. 우리 모두 불쌍한 사람들이잖아. 서로를 붙잡으면서도, 결국 서로에게 상처만 주고 있는…”
그녀의 말끝이 흐려졌다. 문득 그녀는 한손으로 와인잔을 잡았다. 그리고 잔의 가장자리에 가만히 손가락을 올렸다. 그리고는 천천히 돌렸다. 맑은 울림이 길게 퍼져 나갔다.
“들려?”
그녀는 그 울림에 귀를 기울이며 말했다.
“울림은 반복되지만, 음색은 조금씩 달라져. 마치 우리의 운명처럼.”
그녀가 혜경에게 시선을 돌렸다.
“혜경아… 동혁과 나는 연인이 아니야. 그저 친구. 아니, 동반자나 동지에 가까운 사이야.”
그 말이 떨어지는 순간, 혜경의 눈동자가 크게 흔들렸다.
정연은 숨을 삼켰다. 잠시 무거운 침묵이 내려앉았다. 혜경이 정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그녀의 두 손을 감싸 쥐었다.
“너도 내게 아주 소중한 사람이야.”
정연의 눈동자에 눈물이 맺혔다. 그때 창밖의 불빛들이 유리창에 부딪히며 흩어졌다.
정연의 눈빛이 흔들렸다. 그녀는 혼잣말처럼 속삭였다.
“난 이제… 또 작별해야 하나 봐.”
그녀의 목소리는 낮았지만, 모두의 가슴이 저려왔다.
“난 다시 버려진 것 같아. 이 황량함을 나 홀로 또 견뎌낼 수 있을까?”
끝내 그녀는 흐느꼈다.
“아니면… 또 다른 사랑이 찾아올까?”
정연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눈시울이 붉어진 동혁이 일어나 정연에게 다가갔다. 그리고 말 없이 그녀를 감싸 안았다. 그의 손이 그녀의 머리카락을 천천히 쓸어내렸다. 그 손길은 말로 다 하지 못한 천 마디의 위로였다.
돌이켜보면, 두 사람은 한 번도 사랑을 고백한 적이 없었다. 연인이라기보다, 세상이라는 험난한 강을 나란히 건너온 나그네에 가까웠다. 서로를 바라보았지만, 결코 붙잡지는 않았다.
때때로 사람의 마음에는 끝내 비워 두어야 할 자리도 있었다. 곁에 서 있다고 해서 모두 닿을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그녀는 알고 있었다.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가 아니라는 것을.
그러나 알면서도 한 발짝 물러나는 것이 더 힘들었다.
잠시 후, 동혁은 정연을 부축해 자리에서 일어났다.
“먼저 가야겠어. 미안해.”
남겨진 자리에는 무거운 침묵만 내려앉았다.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못했다.
창밖의 한강대교에는, 수많은 불빛이 어둠을 가르며 끝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교차하고, 흩어지고, 다시 멀어졌다. 그 불빛 하나하나가 마치 누군가의 사랑이 스쳐 지나간 흔적처럼 떨리고 있었다.
혜경의 눈빛도 함께 흔들렸다. 하지만 그것이 눈물이었는지, 불빛의 반사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그 진실은 어둠만이 알고 있었다.
이제 그들의 운명에, 또 다른 거대한 파도가 밀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