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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취임한 도널드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발언은 상대의 혼을 빼놓을 것 같다. 캐나다와 멕시코를 향해, 덴마크와 아일랜드를 향해, 또 러시아와 우크라이나를 향해 그는 취임 첫날(20일)부터 무차별적으로 말 폭탄을 쏟아냈다.
그리고 대엿새가 지났다. 그의 발언을 되짚어보면, 정형화된 수사(修辭)의 틀을 찾을 수 있다. 우크라이나 전쟁과 관련해 상대(푸틴 대통령 혹은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에게 처음에는 친근함을 한껏 과시하다가 전쟁의 종식을 요구하고, 이를 거부할 경우 제재(혹은 지원 중단)를 가하겠다고 위협하는 식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24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 기사중 '트럼프 (대통령)의 젤렌스키 대통령 비난, 푸틴 대통령은 협상 준비'(Трамп критикует Зеленского, Путин готов к переговорам)라는 코너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계속 푸틴 대통령과 만날 의향이 있다고 말하면서 러시아가 협상을 거부하면 제재를 가하겠다고 위협했다"고 전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전날(23일) 다보스 세계경제포럼의 화상 연설을 마친 뒤 백악관에서 기자들에게 "푸틴 대통령이 나를 만나고 싶어하고, 우리가 만나지 않는 사이 매일 군인들이 전쟁터에서 죽어가고 있다"며 "나는, 가능한 한 빨리, 즉시 그를(푸틴 대통령) 만날 것"이라고 말했다. 또 "제재로 인해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와의 협상 테이블에 앉게 될지는 모르지만 협상은 필요하다”고 덧붙였다.
이어 폭스 뉴스와의 인터뷰에서 러시아가 빠른 협상에 동의하지 않으면 제재와 관세를 부과하겠다고 위협했다. 그러면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미 협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애당초 전쟁을 시작하지 말았어야 했다"고 비판했다.
트럼프 대통령은 "그(젤렌스키 대통령)는 자신보다 훨씬 더 큰 상대와 싸우고 있다"며 "우크라이나인들은 용감했지만, 미국은 수십억 달러를 주는 등 유럽보다 2000억 달러를 더 썼다"고 주장했다. 또 "전쟁은 조(바이든 전 대통령)를 사이에 두고 미국과 러시아 간의 대리전이 되었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은 러시아에 못지 않게 3만 대의 탱크를 보유하고 있다고 했으나. 막상 아무 것도 없었고, '무기 달라'는 요청에 (미국은) 마구 퍼주었다"고 지적했다.
스트라나.ua는 "트럼프 대통령이 젤렌스키 대통령의 평화협상 의지를 높게 평가했지만, 우크라이나 권부(젤렌스키 대통령과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는 '지금은 협상을 시작할 때가 아니다'라고 계속 거부한다"고 지적했다.
반면, 모스크바는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 맞장구를 치고 나왔다고 평가했다.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우크라이나 문제에 대해 미국과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지만, "아직까지 워싱턴으로부터 접촉을 위한 어떤 신호도 받지 못했다"고 밝혔다.

푸틴 대통령도 "트럼프 대통령과 늘 사업적이며 동시에 실용적이고 신뢰하는 관계를 유지해왔다"며 "그가 계속 대통령으로 남아 있었다면(2020년 대선 승리), 우크라이나에 전쟁은 없었을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내가 백악관에 있었다면 전쟁을 막았을 것"이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주장에 동의한 것이나 다름없다. 그는 또 "우리는 우크라이나와 협상을 할 준비가 되어 있지만, 2022년 9월 우크라이나 국가안보국방회의(안보회의) 결정에 따라 대통령령으로 발표된 나와의 접촉 금지 조치를 해제하는 것이 우선"이라고 주장했다.
스트라나.ua는 "러시아 측의 반응으로 볼 때 이제 공은 트럼프 진영으로 넘어갔다"며 "미 월스트리트저널(WSJ, 23일) 등 서방 언론에 따르면 미국의 대(對)러 제재 위협은 더 이상 크렘린에 어떤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WSJ은 "러시아 지도부는 트럼프 대통령의 말 폭탄을 '협상 전 자세'로 인식하며 개의치 않고 있다"며 "러시아는 적어도 1년 간 싸울 태세가 되어 있다"고 썼다.
취임하기 전 러시아를 향해 우호적안 발언을 마다하지 않았던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과 동시에 사흘 연속 러시아에 대한 강경 발언을 쏟아냈다. 그는 취임 당일인 20일 "푸틴 대통령이 (전쟁 종식에) 합의하지 않음으로써 러시아를 파괴하고 있다"고 비판했고, 이튿날(21일) 기자회견에서는 "러시아가 종전 협상에 나오지 않으면 추가 제재를 가할 수 있다"고 경고했다. 22일에는 자신의 소셜미디어(SNS)인 '트루스소셜'을 통해 "러시아가 곧 협상하지 않으면 조만간 높은 수준의 세금, 관세, 제재를 할 수밖에 없다"고 강조했다. 나아가 러시아가 전쟁을 수행하지 못하도록 국제유가도 끌어내리겠다고 했다.
러시아를 향해 '전쟁을 멈춰라'는 트럼프 대통령의 이같은 협박은 일각에서는 '최후 통첩'으로 인식되지만, 허술하기 짝이 없다는 비판도 있다. '최후 통첩'은 구체적인 요구조건을 제시하고, 응하지 않을 경우 어떻게 하겠다는 게 기본 요건인데, 트럼프 대통령의 발언에는 '전쟁 중단' '평화협상'이라는 추상적인 요구만 담겨 있다는 것이다.
카네기 센터의 러시아 유라시아 전문가인 타티아나 스타노바야 선임연구원은 "푸틴 대통령은 일련의 트럼프 대통령 발언을 '정치적 게임'의 하나로 보고 있다"며 "이를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도, 딜(거래)이 빨리 이루어질 것이라는 환상도 갖고 있지 않다"고 지적했다. 그녀는 "푸틴 대통령에게 이상적인 선택은,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유럽에) 냉전 체제를 구축한 얄타 회담과 같은 지정학적 질서의 개편"이라며 "푸틴 대통령은 전쟁을 끝내기를 원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은 서방을 얄타 2.0 협상 테이블로 끌어들이는 방법의 일환으로 보고 있다"고 주장했다.
다국적 NGO인 국제 위기 그룹(International Crisis Group)의 분석가 올레그 이그나토프는 "크렘린은 이미 트럼프 집권 1기에서 그의 의사소통 스타일에 짜증을 냈다"며 "이는 러시아인과 의사소통하는 방식이 아니다"고 주장했다. 트럼프 대통령이 러시아를 향해 새로운 제재를 가하겠다고 협박하는 것은, 오히려 협상을 멀어지게 할 뿐이라는 것이다.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도 23일 브리핑에서 "트럼프 대통령은 첫 임기 때도 제재 방법을 가장 자주 사용한 미국 대통령이었다"며 "그는 이런 방법을 좋아한다. 최소한 자신의 첫 임기 동안에는 그랬다"고 시큰둥했다.
하지만, 스트라나.ua는 트럼프 진영이 '협박 캠페인'을 시작한 것은 이미 진행 중인 협상의 한 요소라는 분석도 있다고 지적했다. 중국의 반응도 의미심장하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며칠 전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전화 통화를 갖고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 방안)을 논의했기 때문이다.
마오닝 중국 외교부 대변인은 24일 브리핑에서 "중국은 우크라이나 위기를 종식시키려는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의도를 지지한다"고 선언하고 “우리는 모든 당사자와 소통할 용의가 있다"고 말했다. 그는 '시진핑 주석이 트럼프 대통령과 우크라이나 전쟁 문제를 논의했는지' 묻는 기자들의 질문에 "중국은 평화협상 진전에 계속 전념할 것"이라며 이같이 답변했다.

주목할 것은, 트럼프 대통령의 측근이자 전 고문인 스티브 배넌이 취임식 전날 한 발언이다. 그는 "트럼프 대통령이 미국 방위산업과 유럽, 그리고 키스 켈로그 우크라이나 특사 등의 주장에 길을 잃어버릴 수 있다"고 우려했다. 그의 발언은 '존슨 대통령이 시작한 베트남 전쟁에 닉슨 대통령의 발목이 잡혔듯이, 트럼프 대통령도 우크라이나 전쟁의 함정에 빠질 수 있다'는 일각의 경고와 맥을 같이 하는 것이다.
관건은 푸틴-트럼프 첫 만남이다. 오는 3월 미-러 협상설이 나오고 있지만, 트럼프 대통령의 거친 말투 속에 만남이 차일피일 미뤄진다면, 그 자체로 협상 결렬을 의미한다고 봐야 한다. 예상대로 만남이 이뤄지고, 순조롭게 진행된다면, 3년간의 긴 소모전을 끝내는 첫 지표가 될 수 있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