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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전 분위기에 국내 대기업들의 러시아 복귀 기대감이 커지고 있지만, 러시아 현지 여건은 그리 녹록지 않은 것으로 보인다. '2년 바이백(buy back) 옵션'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등 러시아 자산을 현지 법인 '아트 파이낸스'(이후 AGR 자동차 그룹으로 사명 변경)에 넘긴 현대자동차가 대표적이다.
현대차 자산을 인수한 AGR 그룹은 2024년 초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 현대차 공장을 가동한 결과, 1년만에 흑자를 기록하는데 성공했다. 또 일부 모델(차종)은 지난해 가장 많이 팔린 승용차 부문에서 3위권에 진입했다.

러시아의 경제유력지 코메르산트 등에 따르면 AGR 자동차 그룹의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петербургский завод AGR Automotive Group, 러시아 법인 이름은 Aвтозавод АГР)은 지난해(2024년) 매출 294억 루블(약 5,000억 원, 루블당 17원 계산/편집자)에 순이익 19억 루블(약 329억 원)을 기록한 것으로 28일 확인됐다. 현대차 상트 공장은 2022년과 2023년 공장 가동을 중단하는 바람에 각각 188억 루블, 166억 루블의 적자를 낸 바 있다.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이후 공장 가동을 중단한 현대차는 2년 가까이 버티다가 2023년 12월 상트 공장 등 현지 자산을 '아트 파이낸스'(AGR 자동차 그룹)에 매각했다. AGR 그룹은 공장에 남아 있던 자동차 부품(러시아식 표현으로는 키트)을 이용해 이듬해(2024년) 2월부터 자동차 조립을 시작했다. 현대차 부품으로 조립했으니, '현대'라는 브랜드를 달아야 하지만, 현대차의 현지 맞춤형 승용차 인기 모델이었던 '솔라리스'로 바꿔달았다.


재취업된 근로자 800여명이 올해 2월까지 1년 동안 '솔라리스' 브랜드를 단 자동차 2만6,000여대를 조립해냈다. 주요 모델은 솔라리스 HS, HC, KRS, KRX 등이다. 이중 솔라리스 HS는 러시아에서 가장 많이 팔리는 승용차 상위 3위에 올랐다.
AGR 그룹의 비즈니스는 현재 순풍에 돛을 단 듯하다. 현대차 공장 인수 이전에 독일 폭스바겐의 자산을 손에 넣은 AGR그룹은 옛 폭스바겐 칼루가주(州) 공장에서 중국의 체리 자동차를 기반으로 한 '테넷'(Tenet) 브랜드의 SUV 차량도 조립, 생산중이다.
올해 청사진도 장미빛이다. 현대차 공장에서 '솔라리스' 생산량을 전년 대비 2.5배 확대하는 한편, 중국 브랜드 Jaecoo(중국 체리 자동차의 하위 브랜드) 브랜드로 J7 모델을 새로 조립, 생산할 계획을 세운 것으로 알려졌다.
나아가 현대차가 2020년 인수한 미국의 GM 자동차 상트 공장을 올해 말까지 재가동할 계획이다.
현지 자동차 전문 매체 카엑스포에 따르면 AGR 그룹은 옛 GM 공장 재가동을 위해 산업통상부와 상트페테르부르크시 당국과 특별 계약 체결을 추진중이다. 또 파트너인 중국 체리 자동차와 함께 공장 설비를 수입, 설치하기 시작했다는 소리도 들린다. 중국 체리와의 협력은 옛 폭스바겐 칼루가 공장의 재가동을 성공시킨 경험을 바탕으로 이뤄졌다고 한다.
AGR 그룹은 Jaecoo J7과 J8 모델을 개량한 SUV 차량을 '솔라리스' 브랜드로 생산할 계획인데, 이미 펜자주(州) 카멘카에 있는 공장에서 약 500대를 시험 조립한 것으로 전해졌다. 이 차량들은 시중에서 판매가 가능한지, 아니면 정부 조달용으로 조립됐는지 여부는 아직 불확실하다고 현지 매체는 전했다.
원래 이 공장은 현대차가 투싼, 팰리세이드, 기아 스포티지를 생산하기 위해 사들였다. 하지만 전쟁으로 생산 계획은 중단됐고, 기존의 상트 현대차 공장과 함께 '아트 파이낸스' 측에 넘어갔다.
AGR그룹이 현대차 상트 공장에서 순익을 내기 시작했고, 옛 GM 자동차 공장에서 '솔라리스' 브랜드의 J7과 J8 모델 생산을 시작하면, 모든 자산을 순순히 현대차에게 넘겨줄까? 설사 넘긴다고 할지라도 큰 돈을 요구하지 않을까? 폭스바겐은 자산을 매각할 때 '바이백 옵션'을 걸지 않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넘어야 할 관문을 또 있다. 현대차 정도의 규모라면, '바이백 옵션'을 행사할 때 러시아 정부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 그 기준은 푸틴 대통령이 지난 18일 러시아 산업·기업인연맹(우리의 한국경제인연합 격) 회의에서 제시한 바 있다.
△ 자산을 헐값에 넘기고 러시아 시장을 떠난 기업이 똑같은 가격으로 자산을 되사는(바이백 옵션) 것은 안된다 △ 다른 브랜드를 달고서라도 러시아 시장을 떠나지 않은 외국 기업들을 존중한다 △ 러시아 기업의 이익이 우선이며 외국 기업의 복귀에 대한 특혜는 없다 △서방 기업이 떠난 틈새시장을 러시아 기업이 채우고 있다면 그 기업의 이익이 우선한다는 등이다.
푸틴 대통령의 기준에 따르면 현대차는 △바이백 옵션을 달고 자산을 넘겼고 △ 다른 브랜드(솔라리스)를 달고서라도 남아 있는 기업이라고 할 수 있다. 비록 넘긴 가격에 현지 공장을 되찾지는 못하더라도 '우대 기업'에 들어간다.
최근 참고할 만한 사례가 등장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이탈리아의 온수기 및 난방 시스템 제조업체인 '아리스톤'이 러시아 시장에 성공적으로 재진출했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시작된 이래 처음이라고 한다. 푸틴 대통령이 1년 전 아리스톤의 러시아 법인을 러시아 에너지 공기업인 '가스프롬'에게 위탁경영(혹은 외부경영 внешнее управление, 우리의 '법정관리'와 유사)하도록 한 대통령령을 해제한 것이다. 자진해서 러시아 회사에게 자산을 매각한 뒤 시장을 떠난 기업과는 차이가 있는 셈이다.
이같은 외부경영은 2023년 7월 프랑스 유제품 기업 '다농'의 러시아 자회사 ‘다농 루스’와 맥주 브랜드 칼스버그가 소유한 현지 양조업체 ‘발티카 브루어리스’가 시초라고 할 수 있다. 당시 푸틴 대통령은 두 법인의 비거주자(외국인) 지분을 러시아의 국유재산관리청(로시무셰스트보)에 이전하도록 하는 행정명령에 서명했다. 두 법인은 러시아 경영진에 의한 위탁경영 체제로 들어갔다고 한다.
아리스톤 그룹의 파올로 메를로니 회장은 27일 러시아 시장으로의 복귀를 공식 발표하면서 "러시아 당국이 지난 수년간의 책임 있는 투자와 경영, 300명이 넘는 러시아 직원 고용, 회사의 지속적인 러시아내 활동을 인정했다"고 설명했다. '아리스톤'은 상트페테르부르크 외곽에 대규모 공장을 가지고 있다.
2022년 2월 전쟁이 터지자 1,000개가 넘는 서방 기업이 러시아 시장 철수를 발표했다. 실제로 많은 브랜드들이 러시아 시장을 떠났다.
물론, 그 사이에 컴백한 기업도 있다. 프랑스 페르노리카가 소유한 아일랜드 위스키 브랜드 '제임슨 위스키'는 2023년 5월 러시아 시장으로 돌아왔고, 프랑스 소매업체 '오샹'은 러시아에 '나의 오샹'(My Auchan)이라는 새로운 매장을 오픈하기도 했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