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련기사
SNS 기사보내기
바로가기기사저장
참여정부 시절, 미국과 자유무역협정(FTA)에 관한 협상이 생각난다. 지난 4월 30일 미국 워싱턴에서 체결된 '미-우크라 광물협정' 뉴스를 접하면서 묘한 기시감이 들어서다. 한미FTA 협상은 2007년 4월 2일 서울 하얏트 호텔에서 최종 타결에 이룰 때까지 쉼없이 나라 전체를 뒤흔들었다. '나라를 팔아먹는다'는 극단적 주장까지 나왔고, '한미 FTA 독소조항 12가지'라는 그럴싸한 분석은 끝까지 소셜 네트워크(SNS)에 남았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트럼프 대통령은 지난 30일 우크라이나와 광물자원에 관한 협정을 체결했다고 밝혔다. 정식 명칭은 미국과 우크라이나 간의 미-우크라 복구 투자 기금 설립에 관한 정부 협정(Соглашение между правительством Соединенных Штатов Америки и правительством Украины о создании Американо-украинского инвестиционного фонда восстановления, 이하 '광물협정')이다. 그동안 언론 보도를 통해 우리에게 익숙해진 용어인 희토류 등 우크라이나 광물자원의 개발에 관한 단어는 찾아볼 수 없다. 전쟁으로 파괴된 우크라이나의 복구를 위한 투자 기금 조성이라는 이미지가 짙다. 협정의 범위를 크게 넓힌 탓도 있겠지만, 대외적인 평판에 신경을 쓴, '외교적인 용어'를 선택한 결과라는 생각이다.

◇외교적인 용어가 판치는 이유
협정 체결 이후, 미국과 우크라이나에서 나오는 반응들도 다분히 '외교적'이다.
마크 루비오 미 국무장관은 협정 체결 이튿날(1일) "전쟁을 끝내기 위한 중요한 단계"라는 의미를 부여했다. 언뜻 우크라 복구를 위한 투자 기금 조성이 휴전 협상에 어떤 영향을 줄까라는 의문이 생긴다. 억지로 끼워맞추자면, '전쟁이 끝나지 않으면 이 협정은 의미가 없다'는 미 뉴욕 타임스(NYT) 분석처럼, 이 협정이 발효하기 위해서라도 '전쟁이 빨리 끝나야한다'는 당위성 정도가 아닐까 싶다. 미-우크라 양측이 이 점을 분명히 인식하고 서명했으니, 그만큼 종전에 가까워졌다는 해석은 너무 앞서 가는 것이다. 종전이 성사되려면 상대인 러시아의 동의도 받아야 한다.
우크라이나측 협정 서명 당사자인 율리아 스비리덴코 제1 부총리 겸 경제장관은 엑스(X)에 올린 글에서 "이번 협정으로 조성된 기금이 전 세계로부터 우크라이나에 대한 투자를 유인할 것"이라고 말했다. 미-우크라 투자 기금이 앞으로 국제 투자 유치의 마중물 역할을 할 것이라는 주장이다. 미국보다는 그나마 현실적인 해석이다.
'광물 협정' 체결을 외교적으로 포장해야 하는 이유는 도 있다. 미-우크라 양국 정상 간의 백악관 충돌에서 보듯, 한미 FTA 못지 않게 험난한 길을 걸어온 협상 과정이 잘 마무리됐다는 홍보 차원에서다.
무엇보다도 미국 측이 제시한 협정 초안에 담긴 독소조항들은 전 세계에 큰 충격을 안겨줬다. 미국의 제국주의적 식민지 약탈 협정이라는 비판이 공공연하게 나돌았다. 한미 FTA의 독소조항 주장에 비해 더하면 더했지, 덜하지 않았던 것 같다. 급기야는 협정 체결을 위해 지난 2월 말 워싱턴으로 날아갔던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백악관에서 트럼프, 밴스 미국의 정· 부통령과 입씨름을 벌이다 쫓겨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 일부 매체에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약탈적인 이 협정에 서명하면, 실각할 수도 있다는 야당 인사의 발언이 실리기도 했다.
이 때만 해도 광물협정 추진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자충수로 여겨졌다. 지난해 미국 대선에서 트럼프 전대통령(공화당 후보)의 승리가 가시화하자,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쟁) 승리 공식'이라는 컨셉(트) 아래, 미국 측에 희토류 등 자국의 자원 개발 권한을 주고, 안보 보장(군사 지원)을 받는 딜(거래)을 제시했다. 바이든 전 미 행정부는 이 제안을 심드렁하게 받아들였으나, '비즈니스 딜'에 일가견이 있는 트럼프 대통령 당선자는 허투루 넘기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측 제안에 우크라이나 사회 인프라 투자 부문과 바이든 전 행정부가 무상으로 지원한 대(對)우크라 군사지원의 상계(相計) 조항 등을 함께 묶어 '우크라이나 투자 기금'을 조성하자고 역제안한 것이다. 하지만, 그 내용이 다분히 19세기 강대국의 식민지 약탈행위를 연상시켰고, 우크라이나에서는 강한 거부감을 촉발시켰다.
하지만, 협정이 체결된 뒤 나오는 반응은 서로 '윈-윈'이라고 하니, 막판 협상 과정에서 독소 소항들이 완전히 사라진 것일까?
◇국가간 협상을 보는 시각은 자의적, 큰 편차
잘 알다시피, 국가간 협정은 지극히 상대적이다. 어떤 협정이든 그 과정은 서로 주고 받는 '딜'이다. 우월적인 갑(미국)과 을(우크라이나)이 있을 뿐이다. 한미 FTA 협상 과정도 크게 다를 바 없었다고 생각한다. 한국이나 우크라이나나, 미국으로부터 받는 것은 당연하고, 주는 것은 손해로 받아들여졌다. 자국내에서 비판적인 여론이 형성되는 것은 자연스럽다.
미-우크라 광물협정 내용을 우리가 상세히 알 필요는 없다. 그동안 논란이 됐던 핵심 조항들이 어떻게 조정, 타결되었는지 살펴보는 것만으로 충분하지 않을까 싶다.
안타까운 것은, 이번 협정을 둘러싼 미국 언론(외신, 국내 언론)과 우크라이나 언론 간의 메울 수 없는 시각적 편차다. 이같은 간극은 지난 3년간 우크라이나 전쟁 보도에서 늘 나타난 현상이기도 하다.
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드러난 '저널리즘'을 분석한 책, '우크리아나 전쟁 3년째, 전쟁 저널리즘'(이진희 지음 맑은 샘 2024년 10월 발간)에는 같은 사안을 보도한, 서방 외신 위주의 국내 언론과 우크라이나 언론 보도를 비교하는 코너가 있다. '국내 언론 보도 vs 우크라이나 언론 보도'(193p) 항목이다. 어떤 시각으로 보느냐에 따라 같은 사안도 달리 보인다는 것이다. 반쯤 차 있는 물컵의 물도 '반이나 남았다' vs '반이나 비었다'로 나뉜다는 이야기인데, 서로 죽고 죽이는 전쟁을 보는 시각이야 오죽하랴.

국익을 다투는 예민한 국가간 협정도 마찬가지일 터. 이번 미-우크라 광물 협정이라고 다를까?
미-우크라 양국은 지난 17일 협상 결렬 위기에 처한 '광물 협정'을 4월 26일까지 체결하겠다는 의향서(MOI)에 서명했다. 그러나 그 시한을 나흘이나 넘긴 30일 스콧 베센트 미 재무장관과 스비리덴코 우크라이나 제1부총리 겸 경제장관이 협정을 체결했다.
◇광물 협정에 대한 논란은 왜?
하지만 우크라이나에서는 서명한 협정 문서의 종류와 그 성격을 놓고 벌써부터 논란이 벌어지고 있다. 미-우크라 간에는 원래 3가지 협정 문서가 있는데, 그중 서문 격에 해당하는 '기본 협정'에만 서명하고 이를 공식 발표했다는 주장이 나온 게 그 시발점이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이번에 서명된 문서는 미-우크라 합작 투자 기금의 조성에 관한 내용과 업무 진행 방식 등을 담은 매우 추상적이고 일반적인 협정이다. 그동안 논란이 된 기금의 조성 방식이나 관리및 운용에 관한 세부 사항, 기금의 사용을 결정하는 메커니즘 등은 명시되지 않았다. 데니스 슈미갈 우크라이나 총리는 워싱턴에서 미-우크라가 각각 50%의 투표권(결정권)을 갖는 동등한 기준으로 기금을 관리할 것이라고 밝혔는데, 이런 내용도 빠졌다. 미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가 양국은 세부적인 내용을 담은 2개의 문서에 추가로 서명했다고 보도한 이유다.
그러나 키예프(키이우)는 이번엔 하나의 기본 협정에만 서명했고, 나머지는 아직 협상이 진행 중이라고 반박했다. 물론 그 내용(초안)도 일체 공개되지 않았다. 상식적으로는 세부적인 내용을 담은, 그러나 공개되지 않는(혹은 서명되지 않은) 나머지 두개의 협정이 서명된 기본 협정보다 더 중요할 것이라는 생각이 든다. 기본 협정에 빠진, 기금 조성및 운영의 구체적인 내용이 담겨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협상 과정에서 변경되지 않은 미국의 약탈적 조항들이 그 속에 담겨져 있을 수도 있다.
실제로 서명된 기본 협정에는 투자 기금의 분배, 운영 원칙 및 기타 구체적인 사항은 또 하나의 '유한 합작기업' 합의(협정, Соглашение об ограниченном партнерстве)에 의해 규제된다는 문구가 들어 있다. '유한 합작기업' 협정이 따로 존재한다는 뜻인데, 서명 여부가 불분명한 2개의 문서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미국은 광물 협정 발효에 필요한 모든 문서에 즉시 서명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키예프가 이를 거부했다고 한다. 안드리 예르마크 우크라이나 대통령 실장의 보좌관인 티모페이 밀로바노프는 "두 개의 문서(협정)은 (서명이) 더 불확실한 상태에 있다"고 설명했다. 두개의 문서는 기금을 관리하는 '유한 합작기업' 협정과 공동 기금의 내부 운영 규칙을 정의하는 '기술적인 협정'이다. 밀로바노프 보좌관은 "우크라이나 의회가 서명된 기본 협정을 비준한 후에야 (우리는) 나머지 두개의 문서에 서명할 수 있다"고 말했다.
폴리티코의 보도는 다르다. 우크라이나가 '기본 협정'과 2개의 추가 문서에 서명하기를 거부하는 바람에 서명 전날까지 체결 여부가 불투명했지만, 우크라이나가 막판에 물러서면서 협정이 체결됐다는 주장이다. 사실이라면 2개의 문서 속에 든 민감한 내용 때문에 대외적으로 서명 자체를 감췄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갖는다.

물론, 나머지 두개 문서의 내용을 굳이 공개하지 않은 것은, 우크라이나 의회의 비준을 받지 않아도 되는 '민간 계약'이기 때문이라도 설도 나온다. 그래서 여기에 우크라이나에게 굴욕적인 조항을 모두 넣었다는 분석인데, 결국 '내용을 감추고 싶었다'는 결론에 이르는 건 마찬가지다.
◇쟁점 조항들은 어떻게 정리됐을까
협정 내용에서 가장 관심이 가는 부분은 우크라이나에 대한 안보 보장 여부다. 당초 희토류 공동 개발(광물 협정)을 제안한 젤렌스키 대통령이 겨냥한 최종 목적이다. 하지만, 미국의 안보 보장 조항은 이번 기본 협정에서 빠져 있다. 추가로 군사 지원이 있을 경우, 미국의 기여금으로 간주한다고만 되어 있다.
미국은 처음부터 이 문서에 안보 보장 내용을 포함하는 것에 반대했으며, 미국이 매장지 및 기타 프로젝트 개발에 개입한다는 사실 자체가 우크라이나의 안보를 보장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우크라이나가 위안을 찾는다면 현지 일간지 키이우 포스트가 보도한 미국의 상업적 무기 판매 의향이다. 이 신문은 광물 협정이 서명된 뒤 트럼프 미 대통령이 우크라이나에 대한 상업적 무기 판매 금지 조치를 해제했다고 1일 보도했다. 백악관은 의회에 우크라이나에 대한 5,000만 달러 규모의 방산 제품 수출을 '상업적 판매(DCS) 프로그램을 통해 허용하겠다는 의사를 통보했다는 것이다. 이 프로그램은 바이든 전 행정부 당시에도 가동됐지만, 제공 무기는 유료가 아니라 무료로 전달됐다.

또 하나의 쟁점은 미국의 대우크라 무상 군사지원에 대한 상계 여부다. 기본 협정에는 이 부분이 명시되지 않았다. 우크라이나 당국이 협상 과정에서 빠졌다고도 했다.하지만 기본 협정에는 미국이 투자 기금 조성에 기여해야 한다는 의무 조항이 없다. 우크라이나가 모든 프로젝트 수입(자원 개발 로열티, 라이선스 수수료 및 기타 수입)의 절반을 투입해야 한다는 조항만 보인다. 미국의 기여 부분은 어디에서 충당될까?
이 대목에서 미국 측 주장이 흥미롭다.
트럼프 대통령은 30일 협정 체결후 열린 각료 회의에서 '광물협정'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서 '미국이 우크라이나에 이미 투자한 자금(3,500억 달러로 주장)을 회수하는 것'이라고 분명히 밝혔다.
스티븐 밀러 미 백악관 부실장도 이튿날(1일) "미국은 대우크라 지원 자금을 광물 거래(협정)를 통해 우크라이나가 지불하기를 원한다"며 "미국은 가능한 한 빨리 거래를 이행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그나마 다행스러운 것은 우크라이나가 체결 막판까지 '벼량끝 협상' 전술로 미국의 양보를 얻어낸 부분도 있다는 점이다.
미 NYT는 "이번 협정이 당초 안에 비해 현저히 개선되었다"며 "우크라이나의 동맹국들도 안도의 한숨을 쉬며 '키예프가 트럼프 행정부와 건설적으로 협력할 수 있다'는 신호로 해석했다"고 전했다.
◇국내 언론 보도 방향은
우크라이나 현지의 이같은 논란들은 국내 언론 보도에서 거의 찾아볼 수 없다.
국내 최대 뉴스 통신사인 연합뉴스는 1일 미국의 발표와 외신 보도를 인용해 "그간 러시아와 밀착하는 듯했던 미국(트럼프 대통령 행정부)이 이번 광물 협정에서는 우크라이나 전쟁의 원인을 '러시아의 침공' 때문이라고 적시했으며, 중단 으름장을 놓던 우크라 군사원조에도 가능성을 열어두면서 우크라이나 쪽으로 다가서려는 노선 전환이 감지됐다"고 전했다. 또 트럼프 대통령이 30일(현지시간) 뉴스채널 뉴스네이션이 개최한 타운홀 행사에서 '광물협정이 푸틴 (대통령)을 억제할 수 있겠느냐'는 질문에 "아마도 그럴 수 있을 것"이라고 대답한 것에도 의미를 크게 부여했다.
스트라나.ua가 중점적으로 다룬 추가 문서 2개의 존재및 서명 논란(폴리티코 보도와 우크라이나 반박/편집자) 등은 일체 거론하지 않았다. 반대로 우크라이나 언론은 '러시아의 전면 침공'에 관한 문구를 언급조차 하지 않았다.
왜 그럴까?
러시아의 '전면 침공' 주장은 전혀 새롭지 않다. 바이든 전 미 행정부와 미국 의회는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직후,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침략을 규탄했으며, 유엔총회에서도 같은 내용의 결의안이 채택됐다. 트럼프 행정부가 올해 1월 새로 출범하면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조기 종식을 위한 여건 조성및 명분 확보 차원에서, 또 바이든 전 행정부의 정책 실패에 대한 책임을 묻는 차원에서 우크라이나 전쟁의 책임을 러시아에서 우크라이나, 미국 쪽으로 조금씩 옮겨왔을 뿐이다.
보다 근본적인 문제는 전쟁 혹은 협상에서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주장만 듣고 전하는 국내 언론의 보도 태도에 있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