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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판 '다보스 포럼'으로 일컬어지는 상트페테르부르크국제경제포럼(SPIEF)이 전쟁 4년 차인 올해도 어김없이 18~21일 열렸다. 주제는 '공동의 가치-다극화된 세계에서 성장의 기반'(Общие ценности — основа роста в многополярном мире).

20일의 본회의는 푸틴 대통령의 개막 연설과 프라보워 수비안토 인도네시아 대통령과 나세르 빈 하마드 알 칼리파 바레인 인도주의 업무 및 청소년 문제 담당 대표겸 왕실 경비대 사령관, 딩쉐샹 중국 부총리, 폴 미샤틸레 남아프리카공화국 부통령 등 초청 인사들의 발표, 토론 순으로 진행됐다.
사회는 특이하게도 스카이뉴스 아라비아 앵커겸 CEO인 나딤 코테이시가 맡았다. 통상 러시아의 유명 언론인들이 앉았던 자리였다. 포럼의 호스트인 푸틴 대통령이 사회자의 질문을 듣기 위해 통역기를 귀에 끼는 특이한(?) 광경도 펼쳐졌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세계질서의 다극화 추세를 중심으로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스라엘-이란 분쟁, 세계및 국내 경제 현안 등에 대해 연설하고, 토론시 사회자의 질문에도 거침없이 답변했다. G7정상회의의 초청을 마다하고 포럼에 참석한 수비안토 대통령은 존재 자체만으로도 주목을 끌었다. 인도네시아는 올해 브릭스(BRICS)에 새로 가입한 회원국이다.

푸틴 대통령은 이날 오후 2시로 예정된 본회의 개막연설을 2시간 가까이 늦은 3시 45분에야 시작했다. 현지 언론은 그의 지각을 아예 '으레 그러려니'하고 여겼다. 그는 그러나 4시간을 훌쩍 넘긴 본회의에서 몇몇 '명언(?)'들을 남겼다. 외신을 통해 '명언'들이 토막토막 알려지는 바람에 그 배경이나 전체 맥락 등을 이해하기기 쉽지 않다. 코메르산트 등 러시아 매체를 보면 사회자의 시의적절한 질문과 푸틴 대통령의 답변, 이어지는 추가 질의응답은 상트 포럼의 묘미를 일깨워준다.
크렘린과 코메르산트 등 현지 언론 보도를 중심으로 SPIEF의 본회의 4시간을 재구성한다/편집자.
푸틴 대통령은 개막 연설은 물론, 단상위 토론에서도 러시아의 경제 상황 소개에 많은 시간을 할애했다. 이스라엘-이란 충돌에 대해서는 "제3차 세계대전 발발이 우려된다"면서 “중재자 역할이 아니라 러시아의 적극적인 참여를 포함하는 분쟁 해결 아이디어를 당사자들에게 제안한 것”이라고 선을 긋기도 했다. 그는 또 이란의 평화적 핵에너지 개발을 지지하면서 "아야톨라 알리 하메네이 이란 최고지도자에 대한 제거 위협은 '말 수준'에 끝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언론의 주목을 받은 푸틴 대통령의 발언들은 사회자의 질문에 답변하는 과정에서 나왔다.

-사회자: 이란에 대해 어떤 입장을 취하든, 한 나라 대통령이 타국 대통령의 암살을 촉구하는 것 자체를 정상으로 봐야 하는 현재 상황은 상트포럼(SPIEF)의 주제나 가치와 모순되지 않는가?
푸틴 대통령:(질문 내용에 별로 신경 쓰지 않고) 나는 동료들의 발언을 메모한다. 딩쉐샹 중국 부총리가 '러시아와 중국이 새로운 세계 질서를 형성하고 있다'고 한 발표도 적어놨다. 하지만 나는 러시아와 중국이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드는 것이 아니라, 공식화하는 것일 뿐이라고 생각한다. 새로운 세계 질서는 마치 떠오르는 해처럼 자연스럽게 떠오르고 있다. 피할 길이 없다. 우리는 이 과정에서 균형을 잡고 대다수 국가의 이익을 충족할 수 있도록 길을 닦고 있다.
-사회자:한 나라가 타국에 우라늄을 농축할 권리가 있고 없고를 결정하고, 강요하고 있다. 타국의 대통령을 죽일 권리가 있다고도 한다. 앞선 질문에 대해 구체적으로 답변해달라.
푸틴 대통령:먼저 그게 (그 전에도 있었으니) 새로울 것은 없다고 생각한다. 러시아는 그동안 다른 나라의 안보를 해치지 않으면서 자국의 안보를 보장하는 방식을 항상 주장해 왔다. 이게 우리의 근본적인 접근 방식이다.
사회자는 현 중동 위기(이스라엘-이란 전쟁)에 대해 '사우스 글로벌'(남반구 개도국)이 힘을 합쳐 확산을 막을 수 있다는 데 대해 단상의 참석자들로부터 동의를 구한 뒤 푸틴 대통령을 향해 물었다.
"러시아 군대는 모스크바가 합병한 우크라이나 4개 지역(도네츠크주·州와 루간스크, 헤르손, 자포로제)을 넘어 계속 (수미주와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로) 진격하고 있다. 어디까지 갈 심산인가? 어제(19일) 세계 주요 통신사 대표들과 만나 '러시아의 땅으로 여기는 우크라이나 지역을 거론했는데.."
이에 대해 푸틴 대통령은 "이미 여러 차례 러시아인과 우크라이나인을 사실상 한 민족으로 본다고 말했다. 그런 의미에서 우크라이나 전체는 우리의 것"이라고 답변했다.
"러시아군의 전진은 정치적 결정이 아니라 군사 작전의 논리에 따른 것이다. 군 지휘관들은 계곡이나 산, 강이 있는 곳, 병력의 최소 손실로 결과를 낼 수 있으려면 어디로 가는 게 더 나은지 고려하기 때문이다. 속담이나 우화가 아닌 (전쟁의) 오래된 규칙이 있다. 러시아 군인의 발이 닿는 곳은 모두 우리의 땅이다."
그래서 푸틴 대통령은 군사작전의 모든 단계에서 접촉한 우크라이나 측에게 협상을 제안했다고 설명했다.
"지금 협상하자, 군사적 행동을 근거로 한 논리는 오히려 당신들(우크라이나)의 상황을 더 악화시킬 수 있고, 시간이 지나면 더욱 불리한 입장에서 협상을 진행해야 할 것이라고 여러 차례 설득했다."
푸틴 대통령의 이같은 발언에 대해 키예프(키이우)는 즉각 발끈했다.
안드레이 시비가 우크라이나 외무장관은 20일 엑스(X)를 통해 "미국의 평화 노력을 완전히 무시하는 것"이라며 "러시아의 최고 전범(대통령)은 더 많은 우크라이나 영토를 점령하고 더 많은 우크라이나인을 죽일 계획을 논의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평화로 가는 유일한 길은 러시아를 완전히 고립시키고, 테러 국가로 규정해 최대한의 국제 제재로 압력을 가하는 것"이라고 강조했다.

푸틴 대통령은 그러나 (치밀어오르는 화를 억누르는 표정으로) 우크라이나군의 쿠르스크주(州) 기습 공격 이야기를 꺼냈다.
"그들(우크라이나)은 우리의 요청을 무시하고, 오히려 쿠르스크주로 쳐들어왔다. 결과는 거기서 7만 6천 명을 잃었다. 재앙이다. 그러고도 계속 위협을 가한다. 우리는 국경을 따라 안전지대(러시아측 입장에선 안전지대, 객관적 표현으로는 완충지대)를 만들어야 한다. 우크라이나는 국경을 따라 전선을 거의 2천㎞로 늘렸다. 그리고 우리에게 위협을 가하고 있다. 우리로서는 선택의 여지가 없다. 긴 국경선을 따라 안전지대를 구축할 수 밖에 없다. 그들이 끊임없이 드론과 대포로 공격해 오기 때문이다."
-사회자:안전지대의 폭은 어느 정도냐?
푸틴 대통령: 수미 지역은 10~12㎞다. 좀 더 나아가면 주도(州都)인 수미시(市)가 있다. 수미시를 점령하겠다는 목표는 없다. 하지만 원칙적으로 배제하지는 않는다.
푸틴 대통령은 또 “우리는 우크라이나에게 항복하라는 게 아니다. 현실을 인정하라는 것"이라고 말했다.
러시아의 광범위한 안전지대 구축 의도는 지난 9일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의 입에서 처음 나왔다. 그는 러시아군이 도네츠크주(州) 서부 경계를 넘어 드네프로페트로프스크주로 진격하고 있다는 국방부의 전날(8일) 발표에 대해 "이는 푸틴 대통령이 약속한 안전지대를 조성하기 위한 것"이라고 설명한 바 있다.
질문은 우크라이나의 극단적 조치에 대한 소문으로 넘어갔다.
-사회자:우크라이나가 절박한 상황에 빠져 (방사능을 발산하는) '더티밤’(dirty bomb)을 투하할지도 모른다는 이야기도 있다.
푸틴 대통령:우리가 '네오나치'라고 부르는 세력이 저지르는 엄청난, 마지막 실수가 될 것이다. 러시아의 핵교리에 따르면, 상식적으로도 우리에게 가하는 모든 위협에는 똑같이 대응해야 한다. 우리는 매우 가혹하게 보복할 것이며, 네오나치 정권은 물론이고 우크라이나 자체에도 큰 재앙이 될 수 있다. 그런 일이 절대 일어나지 않기를 간절히 바란다. 다행히도 키예프(키이우)가 더티밤을 투하할 의도가 있다는 게 확인된 바 없다."

사회자는 푸틴 대통령을 겨냥해 수비안토 대통령에게 예민한 질문을 은근슬쩍 던지는 '운영의 묘'를 선보이기도 했다.
이에 맞장구를 치듯 수비안토 대통령이 "넬슨 만델라 남아프리카 공화국 대통령을 가장 존경한다"며 "그를 감옥에 보내고 탄압한 기득권 세력을 용서하고 화해하는 만델라의 정신을 배우고 싶다"고 답변했다. 또 "난 군인 출신이지만 전쟁보다는 평화를 더 원한다"고도 했다. 듣기에 따라서는 푸틴 대통령에게 '이만 전쟁을 끝내는 게 좋겠다'는 의사 표시로도 해석이 가능하다.
그는 G7 정상회의 초청에 응하지 않고 러시아를 찾은 이유에 대해 "G7 초청 이전에 이 포럼 참석을 약속했기 때문"이라며 "행간을 읽지 말아달라"고 부탁했다. 또 "'천 명의 친구로는 부족하고, 한 명의 적은 너무 많다'는 말처럼, 우리는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되고 싶고, 모두가 우리의 친구가 되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지난해 10월 취임한 수비안토 대통령은 러시아와 중국이 주도하는 브릭스에 가입하면서 서방보다는 중국·러시아에 가까워지려 한다는 평가를 받아 왔다.

이에 앞서 푸틴 대통령은 19일 세계 주요 통신사 대표들과 2시간여에 걸쳐 가진 면담에서 "모스크바와 키예프 간 새로운 협상(이스탄불 3차 협상)이 22일 이후에 진행될 수 있다"며 "젤렌스키 대통령과도 만날 준비가 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나 두가지 조건을 제시했다.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만남은 전쟁 종식을 위한 협상의 마지막 단계에서 가능하고 △최종 문서 서명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아닌) 합법적 권한을 지닌 우크라이나 국가 원수가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최종 합의안이 합법적 권한을 지닌 사람이 서명하지 않으면, 언제든지 쓰레기통에 들어갈 수 있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차기 대선에서 승리해 서명하거나, 대선이 치러지지 않을 경우 우크라이나 헌법에 따라 대통령 궐위시 권력을 승계하는 최고라다(의회) 의장이 서명해야 한다는 게 러시아 측의 일관된 주장이다.
푸틴 대통령은 또 "독일 타우러스 순항미사일의 우크라이나 제공이 전쟁 판도에 영향을 미치지 않을 것"이라며 "러-독 양국 관계를 악화시킬 게 분명하다"고 경고했다. 이스라엘-이란 분쟁에 대해서는 "양국이 서로의 이익을 절충하는 합의에 도달할 수 있을 것으로 믿는다"며 "러시아는 이란의 평화적 핵이용과 이스라엘의 안보 보장을 모두 지원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강조했다.
그는 이날 면담이 끝난 직후 로이터 통신 측이 추가로 "지난 25년간 집권하면서 어떤 실수를 저질렀다고 생각하느냐"고 묻자, 성경 구절(요한복음 7장, 8장)을 인용해 "너희 중에 죄 없는 자가 먼저 나에게 돌을 던져라"라고 답변한 뒤 "여기서 그만 끝내자"며 언론과의 만남을 마무리했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