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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부 서방 언론으로부터 전시(戰時) 상황을 빙자한 권력 독점 행보라는 비판을 받아온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친정 체제 구축의 마지막 단계를 넘어서려다 넘어졌다. 그가 정치 생명을 건 도박을 한 만큼 엄청난 후폭풍에 시달릴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친(親)젤렌스키 진영에서는 반대 세력의 발목잡기를 그 이유로 내세웠지만, 야당 진영의 논리는 정반대다. '권위주의 독재 정권화' 혹은 '제2의 푸틴'를 노리다가 실패했다는 것이다. 1991년 독립 이후 우크라이나의 권력 수난사를 보면, 그같은 비판도 나올 만하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25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 중 '젤렌스키 대통령의 국가반부패국(NABU, 러시아어로는 НАБУ, '나부'라고 읽는다) 실책'(Фиаско Зеленского с НАБУ)이라는 코너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날(24일) NABU의 권한을 제한하기로 했던 계획을 포기했다"며 "NABU와 함께 부패 사건의 기소를 담당하는 반부패특별검사실(SAPO)을 검찰총장의 지휘를 받도록 한 법안 12414호를 철회하는 새 법안을 최고 라다(의회)에 제출했다"고 밝혔다. 부패 척결의 일선에 서 있는 NABU와 SAPO는 조직의 독립성과 자율성을 인정하는 대통령의 새 법안 제출에 만족한다고 밝혔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번복은, 국가의 부패 척결 사법당국의 권한 축소및 독립성 박탈에 대한 나라 안팎의 저항이 예상보다 거셌기 때문이다.

의회가 NABU와 SAPO의 독자 수사및 기소 권한을 제한하고, 주요 사건의 경우, 검찰총장의 지휘를 받도록 한 법안(이하 반부패 관련 법안)을 통과시킨 지난 22일, 수도 키예프(키이우)를 비롯, 하르코프(하르키우)와 오데사, 드네프로, 자포로제(자포리자) 등 전국 주요 도시에서는 입법 반대 시위가 열렸다. 이튿날(23일) 시위 규모는 더 커졌고, 전국으로 확산될 조짐마저 보였다.
정치권과 언론 일각에서는 친(親)러시아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 정권이 붕괴한 2014년 '유로마이단 사건'과 같은 비극적인 결말로 치닫을 수 있다는 우려가 제기됐다. 야누코비치 전 대통령이 당초 약속한 유럽연합(EU)과의 협력 협정 체결을 포기하자, 이에 반발한 반대 세력이 2013년 11월 가두 시위에 나섰고, 이듬해 유혈 사태와 함께 정권이 붕괴된 게 바로 유로마이단 사건의 교훈이다. 반부패 사법 조직의 권한을 축소한 젤렌스키 대통령에 반대하는 반대 진영의 시위가 더욱 거세질 경우, '제2의 유로 마이단'이 될 수 있다는 뜻이다.
2013년과는 달리, 계엄령 하에서는 모든 시위가 원천적으로 금지되지만, 반(反)젤레스키 진영에서 형사적 처벌을 무릅쓰고 시위를 주도하고, 일정 규모 이상의 시위대가 키예프 시내로 쏟아져 나왔다는 것만으로도 젤렌스키 정권을 위협하기에 충분했다는 주장도 있다.
반대 세력의 기를 살려준 것은 독일과 프랑스 등 EU 주축국가들의 반대 성명이다. 유럽 국가들은 반부패 기관의 권한을 축소하는 법안(반부패 관련 법안)에 대한 반대 의사를 분명히 표시하며, EU 가입을 위한 후보 자격을 박탈할 수도 있다고 위협했다. 영국의 파이낸셜 타임스(FT) 등 외신들은 젤렌스키 대통령과 안드레이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의 권력 독주를 비판하며, 반부패 기관의 권한 축소는 유럽의 대(對)우크라 재정 지원과 EU 가입에 의문을 제기한다고 지적했다. 실제로 우크라-EU 관계가 악화하는 쪽으로 상황이 전개되면, 우크라이나 사회 분위기는 유로마이단을 촉발한 2013년 대규모 시위 직전과 비슷하게 흐를 수도 있다.

이같은 상황에서 EU 집행위원회의 기욤 메르시에 대변인은 25일 "우크라이나는 EU가 요구한 16개 개혁안 중 3개를 이행하지 못했기 때문에 우크라이나 기금 프로그램의 4차 지원분 전액을 받지 못하게 될 것"이라고 쇄기를 박았다. 메르시에 대변인은 "우크라이나 당국은 지난 6월 초 4차 지원분을 요청했다"면서 "그러나 권력의 분권화와 부패 및 기타 범죄로부터 얻은 검은 자산의 색출 및 회수, 반부패 고등법원의 판사 임명 등 3가지 개혁안이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에 전체 45억 유로 중 30억 5천만 유로만 우크라이나에게 지급할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가 요청한 지원금은 EU가 2024년부터 2027년까지 우크라이나에 최대 500억 유로를 대출 형태로 지원할 수 있도록 한 특별 기금 프로그램이다.
이에 앞서 G7(주요 7개국) 대사들은 22일 새 법안(반부패 관련 법안)에 심각한 우려를 표명했고, 우크라이나 주재 EU 대표단의 카타리나 마테르노바 단장은 X(엑스)를 통해 "키예프가 개혁을 중단하면, (EU의) 원조를 받지 못할 수 있다"고 암시했다.
이튿날(23일)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젤렌스키 대통령과 전화 통화에서 새 법안에 강한 우려를 표명하고 설명을 요구했다.
이같은 직접적안 압박은 반부패 기관의 권한 축소를 추진한 젤렌스키 대통령과 예르마크 대통령실장이 미처 예상하지 못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정치 생명을 건 젤렌스키 대통령의 도박
영국의 더 타임스가 젤렌스키 대통령의 (마지막) '정치적 도박'으로 부른 반부패 기관의 권한 축소는 이달 초부터 본격적으로 시작됐다는 게 현지 언론의 분석이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인사 추천위에서 넘어온) NABU 출신의 알렉산드르 치빈스키를 경제 안보국(BES) 국장으로 임명하는 것을 미루다 거부하는 것을 시작으로, 해외 보조금으로 운영되는 반부패 투쟁 센터(CAC, 러시아어로는 Центр по борьбе с коррупцией)의 비탈리 샤부닌 센터장이 병역을 기피했다는 폭로가 터져 나왔고, 급기야 21일에는 국가보안국(SBU)이 NABU와 SAPO 조직 내부에 러시아 정보요원(러시아 정보기관 FSB의 협력자/편집자)이 있다는 이유로 두 기관에 대해 대규모 압수수색을 실시했다.
그리고 키예프 법원은 22일 SBU가 체포한 빅토르 구사로프 수사관을 구속해 SBU에 힘을 실어줬고, NABU내 지역 부서 책임자인 루슬란 마가메드라술로프까지 구금됐다. 구사로프 수사관은 NABU의 정예 그룹 'D-2' 소속이라고 한다.
동시에 의회는 이날 반부패 기관의 권한에 관한 형법 개정안(12414호 법안)을 전격적으로 통과시켰다. 반부패검사실(SAPO)이 검찰총장의 산하로 이관된다는 게 핵심. 이는 NABU로부터 수사 결과를 이첩받아 기소해온 SAPO가 검찰총장의 지휘를 받는다는 뜻으로, 수사및 기소의 독립성이 박탈되는 셈이다. 이 법안은 의회 통과 직후 루슬란 스테판추크 국회의장, 젤렌스키 대통령으로 넘어가 곧바로 서명됐다. 반부패 기관들의 정체성을 바꾸는 중대한 법안(반부패 관련 법안)의 입법(立法)이 채 하루도 걸리지 않고 속전속결로 끝난 것이다.
당연히 반대 진영은 폭발했다. 이에 젤렌스키 대통령은 새 법안 채택 불과 이틀만인 24일 손을 들고 물러났다. 문제의 법안(12414호, 반부패 관련 법안)을 철회하는 수정 법안을 의회에 제출했다고 공식 발표한 것이다.
수정 법안은 보안국(SBU)이 반부패 기관 소속의 검사나 수사관, 직원들에 대해 러시아 측과의 접촉 여부 등 연관성을 조사할 수 있도록 허용했다. 하지만 이 조사가 NABU 조직 자체의 권한 행사에는 영향을 미치지 못할 것으로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설사 일부 수사관에게 문제가 있다고 하더라도 NABU가 그 수사관을 교체한다면, 조직이나 권한 행사에는 큰 영향을 받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되돌아 보면 반부패 관련 법안의 채택에서 젤렌스키 대통령이 이를 철회할 땨까지의 이틀간은 유로마이단 사건 직전처럼 아주 긴박하게 흘러갔다.
◇ 젤렌스키 반대 진영의 선공
공격은 시작한 곳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전임인 페트로 포로셴코 전 대통령 진영이다. 모스크바에서 온 돈가방 스캔들로 감옥에 갈 처지에 몰린 포로셴코 진영이 우크라이나의 반부패 투쟁 단체들과 손잡고 젤렌스키 대통령 정권에 맞서기로 한 것. 위기로 몰린 것은 우크라이나의 반부패 투쟁 단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바이든 전 미 행정부로부터 보조금을 받고, 또 역할을 위임받아 권력형 부정 부패에 대한 감시자 역할을 맡아온 이 단체들은 트럼프 미 대통령의 등장이후 찬밥 신세로 변했다. 그동안 권력형 부정및 비리를 폭로하면서 반부패 기관들에 못지 않게 확보한 정치적 영향력도 잃을 판이었다.
손을 맞잡은 두 진영은 새 경제 안보국(BEB) 수장의 임명 거부와 SBU의 반부패 기관 압수 수색에 대해 "대통령이 반부패 기관의 '힘빼기'를 통해 자신과 측근을 보호하고, 그 결과는 우크라이나의 EU 가입과 EU와의 비자 면제 제도의 취소로 이어질 것"이라는 논리로 젤렌스키 대통령을 공격했다. 우크라이나의 태생적인 부패 구조를 잘 알고 있는 유럽은 처음부터 비자 면제의 조건으로 특별 검사실과 법원을 갖춘 반부패국의 창설을 요구해 왔는데, 젤렌스키 정권이 그 취지에 역행하고 있다며 공격 포인트로 삼은 것이다.
반부패 기관의 권한을 제한하는 법안이 22일 제출되자, 이들은 곧바로 "우크라이나에는 '제2의 야누코비치 정권이 등장했다"고 직격했다. "유로마이단 사태 이후 지난 10년간의 반부패 투쟁을 무위로 돌리고 부패한 사법권이 판치는 야누코비치 정권의 '어두운 시대'로 회귀하고 있다"고도 했다. 이들은 또 "EU 가입이라는 지난 10년간의 열망을 젤렌스키 정권이 꺾어버리고 있다"는 비판도 서슴치 않았다. NABU와 SAPO는 유로마이단 사건이후 우크라이나 시민단체와 국제사회의 압박으로 만들어진 반부패 기관이었다는 점에서 이들의 주장은 호소력이 짙었다.
특히 반부패행동센터(CPC Центр противодействия коррупции (Украина)) 집행위원장 다리야 칼레뉴크는 페이스북을 통해 "우크라이나는 반부패 인프라 구축 덕분에 2022년 6월 EU 가입 후보 지위를 획득했다"며 "젤렌스키 진영은 새 법안으로 2013년 11월 야누코비치 전 정권이 그랬듯이 우크라이나가 EU에서 등을 돌리게 하고 있다"고 주장했다. 국제 르네상스 재단의 알렉산더 수슈코 대표는 페이스북에 새 법안 채택으로 예상되는 우크라이나의 향후 문제를 조목조목 짚었다.
두 단체는 (반부패 기관의 권한을 제한하는) 법안의 표결이 이뤄진 22일 저녁, 키예프의 프랑코 극장 앞 광장으로 몰려갔다. 시위 현장에는 포로셴코 전 대통령 측의 '유럽연대'(EP)당 소속 의원들과 언론(인플루언스), 청년들도 모여들었다. 이날 소셜 미디어(SNS)에는 시위 영상·사진으로 넘쳐났다. 시위자들이 든 손 팻말에는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가 아니다", "부패는 죽음", "영웅은 국토 수호, 공동체는 법", "누구를 위해 법을 다시 쓰는가", "최고의 배신자여, 12414호법을 폐지하라" 는 등의 구호가 적혔다. 머리에 뿔을 달고 귀를 막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모습을 그리고, "우리 말을 듣지 않는다"고 쓴 팻말도 등장했다.


외치는 구호는 더욱 실랄했다."젤리아(젤렌스키) 악마",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 엿먹어"와 같이 자극적이었다.
다음 날(23일) 시위대는 더 불어났다. 젊은이들은 전날과 마찬가지로 포장용 골판지에 자극적인 구호를 적었다. 골판지 구호는 외신을 통해 단번에 이번 반부패 시위의 상징이 됐다.
시위에는 반부패 관련 단체들 뿐만 아니라 반(反)젤렌스키 정치 성향을 지닌 세력도 참가했다. 그간 수차례 젤렌스키 정권의 독재화를 비난한 비탈리 클리치코 키예프 시장과 그의 동생 블라디미르의 모습이 보였고, 이고르 콜로모이스키 등 대표적인 우크라이나 올리가르히(과두 재벌) 세력들과 기업가, SBU에 의해 억울하게(?) 당한 피해자들, 당국의 강제 동원에 불만을 품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도 몰려왔다. 정권 불만 세력들이 동참하면서 거리 분위기는 더욱 출렁이기 시작했다. 전국 여러 곳에서 시위가 동시다발적으로 진행되면서 SNS는 폭발했다. 24일에는 키예프에서 야간 횃불 집회까지 열렸다.
이같은 시위가 소위 '젤렌스키 독재'에 대한 항의로 확대되거나 강제 진압이 이뤄졌다면 상황은 더욱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었을 것이다. 어쩌면 '제2의 유로마이단'이 시작됐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젤렌스키 정권은 그같은 위협을 즉각 파악하고 뒤로 물러섰다는 게 현지 정치학자 안드레이 졸로타레프의 진단이다.
정치 전략가 비탈리 쿨릭은 "전쟁 중이고 어떤 것이든 제한될 수 있다는 사실을 우크라이나인 모두가 알고 있다"면서 "정권은 이같은 상황을 교묘하게 이용해 언론과 시민사회의 불만을 억누르고, 강제 동원으로 국민을 협박해왔는데, 이에 대한 반발 심리가 이번에 폭발한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전쟁 중에 만연한 지배층의 부패 스캔들과 권력의 기업 약탈및 억압 등에 대한 소문들을 잠재우려는 권력의 섣부른 시도는 되레 반발을 불렀다"고도 했다. 전시 친정 체제 구축이 오히려 권력 기반을 와해하는 자충수가 됐다는 지적이 나올 만하다.
◇번번히 실패한 우크라 지배층의 권력 강화 야망
지난 30여년간의 우크라이나 정치 여정을 보면, 역대 정권의 권력 강화 시도는 번번히 실패한 것으로 나타났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과 함께 소련을 붕괴시킨 주역인 레오니드 크라프추크 대통령을 제치고 제2대 우크라이나 대통령에 오른 레오니드 쿠치마는 무려 10년 이상(1994년 7월 19일 ~ 2005년 1월 23일) 장기 집권했지만, 소위 '테이프 스캔들'과 서방의 지원을 받는 빅토르 유셴코라는 친서방 엘리트층의 등장으로 1인 체제 구축에 실패했다(2004년 오렌지 혁명). 이후 대통령의 권한을 제한하는 헌법 개정안이 통과됐고, 정치 주도세력이 분열되면서, 올리가르히(과두 재벌)들이 정치 전면에 등장했다.
2010년 선거에서 승리한 친러 성향의 빅토르 야누코비치 대통령은 푸틴 대통령의 권력 강화 수법으로 올리가르히 세력을 제압하고, 헌법재판소 판결을 통해 대통령의 권한을 강화해 국가 전반에 대한 완전한 통제권을 확립하고자 했다. 하지만 친러-친서방 세력의 대립 속에 2014년 유로마이단 사건으로 러시아로 도망갔다. 대통령의 권한은 다시 축소되고, 올리가르히들은 영향력을 다시 회복했으며, 의회 권력은 (야누코비치 대통령에 이어 등장한) 포로셴코 새 대통령의 권력 강화에 제동을 걸었다. 특히 2014년 러시아의 크림반도 합병과 돈바스(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 분쟁으로 친러, 친서방 세력은 서로 적대시하며 으르렁거리기 시작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권력을 잡은 뒤 초기에 올리가르히의 영향력 척결에 나섰다가 되치기를 당했다. 올리가르히 소유 언론들은 대통령 공격에 나섰고, 대통령과 집권 여당에 대한 지지율이 추락하면서 2020년 지방 선거에서 패배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국가안보국방위원회(NSC, 우리 식으로는 청와대 안보실)를 통해 올리가르히에 대한 반격에 나섰다. 첫 대상이 친러 성향의 빅토르 메드베추크와 그의 TV 채널들이었다. 이어 2021년 7월, 우크라이나 과두 정치(올리가르히 정치)의 균형을 잡아온 아르센 아바코프 내무장관을 해임했다. 올리가르히와의 싸움에서 승기를 잡는 듯했다.
그해 가을 올리가르히 아흐메토프가 소유한 우크라이나 TV 채널들이 반격에 나섰고, 다른 올리가르히들이 동참하면서 젤렌스키 대통령의 지지율은 급격히 추락했다. 그가 2024년 말로 예정된 차기 대선에서 재선될 것으로 믿는 전문가들은 거의 없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은 젤렌스키-올리가르히 싸움의 판을 완전히 바꿔놓았다. 계엄령을 바탕으로 젤렌스키 대통령은 올리가르히 세력의 영향력을 완전히 무력화했다. 대통령은 국가안보국방위원회(NSC)의 제재나 형사 소송을 통해 언제든지 올리가르히들을 파멸시킬 수 있을 정도로 권력을 강화했다. 실제로 올리가르히 이고르 콜로모이스키는 부패 혐의로 체포, 수감됐다. 대통령 권력의 주요 제약 요인이었던 올리가르히의 영향력이 사라지자, 그 자리를 다른 세력이 메웠다. 2014년 유로마이단 사건 이후 서방 측이 우크라이나 정부를 통제하기 위해 만든 NABU와 SAPO 등 반부패 기관과 이를 지원하는 시민 단체들이다. 전쟁 지원에 힘을 아끼지 않았던 바이든 미 행정부도 이들에게 힘을 실어줬다.
◇마지막 걸림돌 제거에 나선 젤렌스키 대통령
(대통령의 지휘를 받은) 우크라이나 보안국(SBU)가 반부패 기관을 압수수색한 데 이어 그들의 권한을 제한하는 새 법안(반부패 관련 법안)을 제출한 것은, 젤렌스키 대통령에게는 1인 권력 체제, 즉 친정 체제 구축의 마지막 시도였다고 할 수 있다. 그는 5년여만에 총리를 교체하는 등 의회의 입김이 강한 행정 권력도 최근 장악하는데 성공했다. 지난 3년 6개월여 간의 전쟁을 통해 올리가르히와 의회, 행정 권력 등을 손아귀에 넣은 것이다. 1인 통치 체제의 구축에 남은 장애물은 외세(外勢, 서방의 영향을 받는 반부패 기관 등/편집자)였다. 당연히 외세의 힘빼기에 힘을 쏟았고, 이는 FT 등 외신들이 잇따라 젤렌스키 체제의 권위주의적 독재화 경향을 비판하는 계기가 됐다.
젤렌스키 정권의 마지막 공세를 우려한 포로셴코 전 대통령 진영과 미국 민주당과 가까운 우크라이나 시민단체들(외세)이 손을 잡고 선공(先攻)에 나선 게 이번 사태를 촉발했다는 분석이 유력하다. 트럼프 미 대통령의 반(反)바이든 성향을 확인하고 자신감을 얻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움직이기 전에 자신들의 영향력 하에 있는 언론과 조직(NABU와 SAPO 직원들)을 동원해 대통령 공격에 나섰다는 주장이다.
이에 대통령 측은 반격에 나섰고, 그것은 반부패 투쟁 센터(CAC)의 비탈리 샤부닌 센터장에 대한 병역 기피 의혹 제기와 유력 매체 '우크라인스카야 프라우다'를 소유한 올리가르히 토머스 피알라 회장에 대한 제재, NABU 등 반부패 기관에 대한 압수수색, 반부패 관련 법안의 채택 등으로 나타났다고 할 수 있다.
양측이 정면 충돌한 직접적인 계기는 NABU가 젤렌스키 대통령의 최측근인 알렉세이(올렉시) 체르니쇼프(체르니쇼프) 부총리를 부패 혐의로 기소한 것. 반(反)젤렌스키 진영은 체르니쇼프 부총리와 '대통령의 지갑'으로 불리는 사업가 티무르 민디치에 대한 NABU의 형사 소송 제기(기소)에 격분한 젤렌스키 대통령이 반부패 기관의 권한 축소에 나섰다고 주장한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24일 반부패 관련 법안을 철회하는 새 법안을 제출한 뒤 기자들과 만나 "반부패 조직의 권한 축소에 반대하는 사회 여론(가두 시위)을 존중한다"며 "의회가 만든 새 법안이 반부패 기관의 독립성을 위협한다면 그 위험을 제거해야 한다"고 후퇴의 정당성을 피력했다.
하지만 반젤렌스키 진영은 대통령의 설명은 앞뒤가 맞지 않는다고 반박했다. 대통령이 이미 법안에 서명했고, 법안을 통과시킨 집권여당인 '국민의 종'은 대통령실의 직접 통제를 받고 있다는 점을 그 이유로 들었다. 실제로 '국민의 종' 소속 많은 의원들은 NABU의 권한을 제한하는 법안이 대통령실의 지휘에 따라 진행되었다고 주장했다. 이는 문제의 법안이 채택되기까지 하루도 채 걸리지 않은, 기록적으로 짧은 시간에 이뤄졌다는 사실에서도 분명하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젤렌스키 대통령의 번복은 이 법안에 찬성표를 던진 많은 의원들에게 충격을 안겨주었을 뿐만 아니라 대통령의 권위와 국정 통제력에 심대한 타격을 줄 것이라는 우려가 쏟아지고 있다.
집권 여당의 한 의원은 스트라나.ua에 "전체 국정 시스템에 대한 통제력 약화, 대통령의 최측근을 상대로 한 NABU의 형사 소송, 대통령실의 국정 장악력 상실 등이 예상된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이 도대체 왜 번복했는지 궁금하다"고 말했다.
◇젤렌스키의 후퇴 이유, 그리고 후폭풍
그렇다면 젤렌스키 대통령이 전격적으로 물러선 이유는 무엇일까? 가두 시위? 유럽 국가들의 압박? 스타머 영국 총리와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의 전화?
가두 시위가 확대되자 젤렌스키 대통령은 23일 상황을 반전시키기 위한 노력에 나섰다. NABU와 SAPO의 수장들, 다른 법 집행 기관 대표들과 만나 "국민들의 목소리를 듣고 있다"고 달랬다. 또 24일에는 키어 스타머 영국 총리와 프리드리히 메르츠 독일 총리와 전화 통화한 사실을 공개하며 법안 검토에 서방 전문가들의 도움을 받기로 했다고 밝혔다. 그러나 그의 시도는 민심을 달래는데 실패했고, 반부패 관련 법안의 철회를 발표해야만 했다.
우크라이나 의회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제출한 새 법안에 대한 표결을 오는 31일 실시할 것이라고 공표했다. 하지만 의회는 이미 내달(8월) 20일까지 휴회를 선언했고, 많은 의원들이 키예프를 떠났다. 그들이 다시 새 법안의 표결을 위해 의사당에 모일 것인지에 대한 견해는 분분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가두 시위가 표결(31일) 이전에 어느 정도 진정되고, 유럽의 관심이 젤렌스키-푸틴 대통령의 정상회담 개최 여부 등 다른 문제로 쏠리면, 은근슬쩍 의결정족수 부족으로 새 법안이 폐기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는 관측도 나온다. 실제로 친(親)젤렌스키 그룹은 가두 시위가 이미 목적(새 법안 제출)을 달성했으므로 중단돼야 한다는 주장을 펴고 있다. 이 주장이 가두로 나선 시위대에게 먹힐까?
새 법안이 통과되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전시 국가 통제력을 강화하려는 시도 자체를 영원히 포기해야 힐 것으로 보인다. 서방 언론의 비판을 받고 있는 그의 오른팔,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에 대한 해고 요구가 더욱 거세지고, 임명을 거부한 경제 안보국(BEB)의 새 수장 임명 압박도 높아질 것이다. BEB 새 수장이 취임하면 젤렌스키 대통령의 권력 행사는 더욱 제한을 받을 게 분명하다.
나아가 NABU는 예르마크 실장, 스비리덴코 신임 총리, 사업가 티무르 민디치를 포함한 대통령의 최측근들에 대한 부패 수사를 진행하면서 젤렌스키 대통령을 압박할 것으로 예상된다.
반대로 포로셴코 전 대통령과 (우크라인스카야 프라우다의 소유주인) 토마스 피알라 회장에 대한 정권의 압박은 중단될 가능성이 높아졌다. 대통령의 의회 장악력도 현저하게 떨어져 의회는 내부적으로 '격동의 시기'를 맞을 수도 있다.
특히 주목할 것은 우크라인스카야 프라우다의 25일자 보도다. 이 매체는 "NABU가 티무르 민디치 부패 사건에 대통령이 연루됐다는 사실을 확인했다"고 보도했다. 민디치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기획사 'Kvartal 95 스튜디오'의 공동 소유주이자 사업가다. 이 매체에 따르면 NABU와 SAPO 관계자들이 5년 전 대통령의 생일 축하 행사가 열렸던 곳과 같은 주소의 아파트를 도청했는데, 거기에는 민디치와 대통령의 목소리도 들어있다는 것이다.
처음부터 반부패 관련 법안에 반대표를 던진 알렉세이 곤차렌코 야당 의원은 스트라나.ua에 "NABU가 민디치 아파트의 바로 위층에 있는 사업가 보골류보프의 아파트에서 약 3개월 동안 민디치의 아파트를 도청했다"며 "그 대가로 보골류보프가 타인의 여권으로 해외로 출국하도록 도와줬다"고 주장했다. 보골류보프는 젤렌스키 대통령의 킹메이커였다가 전쟁 후 부패 혐의로 구속된 올리가르히 이고르 콜로모이스키의 사업 파트너다.
곤차렌코 의원은 또 "민디치 아파트는 무기 구매 계약과 에너지 부문 뇌물, 기업 압류, 제재 대상 기업 선정 등을 논의한 대통령의 '그림자 사무실'과 다름없다"는 주장을 펴기도 했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NABU의 권한 축소를 시도한 이유 중 하나가 민디치에 대한 수사라는 게 그의 주장이다. 실제로 NABU는 지난 6월 초 우크라이나를 탈출하려던 민디치의 지인을 구속하고, 그를 정부 입찰에서 6억 6,400만 흐리브나를 횡령한 혐의로 기소했다고 한다.
현지 언론에 따르면, 민디치는 전쟁 중에 젤렌스키 대통령의 '비선'(秘線)으로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한 것으로 전해졌다. 그는 정부나 대통령실에 어떤 공식적인 직위도 갖고 있지 않았다. NABU가 민디치를 드론 생산 관련 부패 혐의로 조사하고 있다는 보도도 나오고 있다.
NABU가 대통령실을 겨냥한 또다른 타킷은 로스티슬라프 슈르마 전 대통령실 부국장이다. 미 국무부도 지난 2024년 그가 우크라이나 경제에 과도한 영향력을 행사했다는 이유로 제재 대상에 올리는 것은 심각하게 고려했다고 한다. 이후 그는 사직하고 독일로 떠났는데, NABU가 최근 독일 사법 당국과 함께 그의 독일 거주지를 압수수색한 것으로 알려졌다. 젤렌스키 대통령으로 직접 연결되는 또다른 부패 고리를 추적하고 있는 셈이다.
조만간에 시위가 진정되지 않으면 젤렌스키 대통령은 더욱 어러운 여건에 처할 것이다. 어쩌면 실권없는 대통령으로 남거나, 사임을 선택해야 할 수도 있다.
무엇보다도 트럼프 대통령의 의중이 중요하다. 한국과 중국, EU 등 각국과의 관세 협상으로 바쁜 미국 정부의 공식적인 입장은 아직 나오지 않았으나, 이번 사태는 우크라이나에 대한 군사 지원을 중단하고 전쟁을 조속히 종식시키려는 구실로 이용될 소지도 충분히 있다.
그같은 징후도 적지 않다.
트럼프 대통령의 전 고문인 스티브 코르테스는 시사주간지 뉴스위크 기고에서 "부패 구조에 얽힌 젤렌스키 대통령을 이번 기회에 더 이상 신뢰하지 말고, 우크라이나에 대한 전쟁과 재정 지원을 중단할 것"을 촉구했다. 그는 폭스 뉴스와 CNN의 해설자를 거쳐 미국노동자연맹(AFL) 회장을 맡고 있다. 그는 "우크라이나 부패 구조는 키예프의 최고 권력층에서 시작된다"며 "젤렌스키 대통령의 진면목은, 그가 티셔츠 차림으로 (지난 2월 말) 백악관에서 트럼프 대통령을 얕잡아보는 듯이 말다툼을 한 이후 분명히 드러났다"고 강조했다. 또 "미국 국민은 (우크라이나 지원에) 놀라울 정도로 관대했지만, 이제는 우리의 인내심도 바닥나고 예산은 부족하다"며 "젤렌스키-예르마크 정권의 최근 행동을 보면, 더 이상 신뢰할 수 없다는 게 분명해지고 있다"고 썼다.
미국 대통령의 우크라이나 특사인 키스 켈로그의 딸 메건 몹스도 NABU의 권한을 제한한 법안의 비판에 동참했다. 그녀는 "정말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어처구니 없이 어리석은 결정"이라며 "미국의 대우크라 정책이 최근 긍정적으로 변하는 시기에 내려진 최악의 결정"이라고 지적했다.
친트럼프 성향의 마조리 테일러 그린 의원은 23일 젤렌스키 대통령을 독재자로 부르며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 "그를 몰아내야 한다"고 요구하기도 했다.
이번 사건으로 우크라이나에는 지금까지와는 다른 사회 분위기가 형성될 가능성이 높다. 무엇보다도 젤렌스키 대통령의 전시 비상 정책에 대한 항의가 젊은이들 사이에서 유행처럼 번질 수 있다. 지금까지 그의 정책을 비판하면, '친러 스파이' 혹은 '반역자'로 찍혔다. 적어도 전쟁 중에 대통령을 비판하는 것은 적을 이롭게 하는 것이라는 공감대가 널리 퍼져 있었다. 하지만 이번 가두 시위로 이같은 고정관념은 깨졌다.
젤렌스키 대통령 주변의 부패 스캔들이 이번 사건으로 우크라이나인들에게는 완전한 '팩트'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NABU의 수사 기밀들이 많이 공개됐기 때문이다. 이 기밀들은 "대통령이 전쟁 중 비리를 저지른 부패한 측근들을 감옥에서 구하기 위해 반부패 기관들의 권한을 박탈했다"는 주장의 증거로 제시됐다. 부패 구조의 정상에는 젤렌스키 대통령이 있다는 논리로 이어지면서 전쟁 발발 이후 형성된 그의 '영웅적 이미지'는 이미 많이 퇴색됐다.
반(反)젤렌스키 목소리가 서방의 주요 언론을 장악한 것도 달라진 현상이다. 외신은 젤렌스키 대통령과 예르마크 실장 등 주요 인물에 대한 부패와 권력 독점, 무능한 국가 통치, 시민들의 권리와 자유의 억압 등을 기사화하기 시작했다. 이전에만 해도 이같은 보도는 "친러시아적인 프로파간다"로 간주됐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단 한번의 결정적인 실책으로 초래한 이같은 위기 상황을 타개하고 다시 국정 통제력을 장악할 수 있을지 예측하기는 힘들다. 시위가 진정될지, 상황이 더욱 악화될지 다음 주에 그 윤곽이 드러날 것이라는 현지 언론의 관측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이 제출한 NABU의 권한 회복에 관한 법안의 통과 여부가 그 핵심이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