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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최고라다(의회) 의장을 지낸 안드레이(안드리) 파루비 의원(54)이 30일 우크라이나 서부 도시 르보프(르비우)에서 괴한의 총에 맞아 사망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와 rbc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포로셴코 전 대통령이 창당한 유럽연대 소속 의원인 파루비는 이날 정오(현지 시간) 무렵 르보프 시내 거리를 걸어가다가 뒤따라온 괴한의 총에 맞아 숨졌다. 경찰에는 총격 사건으로 신고가 들어왔는데, 희생자가 파루비 의원으로 확인됐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엑스(X·옛 트위터)에 내무장관과 검찰총장으로부터 "파루비 전 의장의 피살 소식을 보고받았다"며 "끔찍한 살인"이라고 규탄했다.
막심 코지츠키 르보프 군사행정청장은 르보프에 비상 검문령(사이렌 작전)을 내리고, 수사력을 총동원해 범인을 쫓고 있다. 이에 따라 현지 경찰은 시내 곳곳에서 임시 검문소를 설치, 모든 차량을 검문검색하는 것으로 전해졌다.
온라인에 공개된 영상에 따르면 스쿠터(혹은 전기 자전거) 헬멧을 쓰고 글로보 택배 배달용으로 보이는 노란색 가방을 든 한 남자가 거리를 걷고 있는 파루비 의원의 뒤를 쫓더니, 어느 순간 권총으로 그를 저격했다. 범인은 파루비 의원을 겨냥해 7, 8발을 쏜 뒤 스쿠터를 타고 현장에서 도주한 것으로 전해졌다. 스쿠터를 탄 총격범의 모습이 언론에 공개됐지만, 신원은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의 피격 원인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있다.
당연하지만, 가장 유력한 게 러시아 배후설이다. 파루비 의원의 정치적 성향과 행적 때문이다. 그는 친(親)러시아 정권의 붕괴를 불러온 2004년 '오렌지 혁명'(1차 마이단)에 참여하고, 2014년 '유로마이단'(통칭 2차 마이단)에서는 주도적 역할을 담당한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성향을 지닌 정치인이다. 유로마이단 성공후 그는 대통령 직속 국가안보국방위원회(우리 식으로는 국가안보실) 서기(실장, 장관급)를 거쳐 2016∼2019년 최고라다 의장을 지냈다.
그의 이같은 정치적 성향을 고려하면, 유로연대당(黨)이 러시아 정보 기관과 수하 격인 우크라이나 내 '제 5열'(Пятая колонна, 1936~1939년 스페인 내전 당시 프랑코 장군의 정보 기관, 현재는 국가의 주요 정책에 반대하는 정치 집단/편집자)이 소속 의원(파루비)을 제거했다고 비난한 건 당연하다. 이 당의 이리나 게라셴코 대표는 "이번 사건은 그의 친(親)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입장과 연결돼 있다"며 "우리의 오랜 원수이자 테러리스트인 러시아와 제5열이 배후에 있다"고 SNS에 썼다.
최고라다의 안보및 국방정보 위원회의 소속 로만 코스텐코 의원은 도즈드 TV 채널에서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최고위 인사들을 제거함으로써 전쟁의 새로운 단계를 열었다"며 "우리도 대칭적으로 대응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 "우크라이나에서는 더 이상 안전할 사람은 없다"고 덧붙였다.
3년 6개월에 걸친 긴 전쟁 기간에 어쩔 수 없이 조장되기 마련인 좌-우 혹은 친(親)정부-반(反)정부 간의 극단적인 정치적 대립과 정치적 폭력에서 이번 사건의 원인을 찾는 견해도 적지 않다.
파루비 의원과 가까운 유럽연대당 인물들은 거의 대부분 "크렘린의 손이 2014년 유로마이단에 적극 참여한 그에게 보복한 것"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일부 인사들은 "파루비가 마이단(대규모 시위)을 조직하는 법을 잘 알고 있다"며 국내 정치적 배경을 배제하지 않았다. 스트라나.ua는 "이번 암살 사건은 다가오는 정치적 격변을 미리 엿보게 한다"고 짚었다. 파루비 의원은 당지도자인 포로셴코 전 대통령과 특별히 가깝지 않았고, 최근에는 몇몇 인사들끼리만 교류하고 있었다고 한다.
실제로 우크라이나에서는 그동안 정치적 폭력이 끊이지 않았다. 지난해 7월 중순, 극우 민족주의 성향의 이리나 파리온 전 의원이 르보프에서 괴한의 총에 맞아 숨졌다. 그녀를 암살한 혐의로 기소된 뱌체슬라프 진첸코가 보리스 필라토프 드니프르시(市) 시장 등 일부 급진 정치인들에 대한 정보를 수집하고 있었다는 사실도 수사 결과, 밝혀졌다.

또 올해 3월에는 극우 활동가 데미안 가눌이 오데사에서 총에 맞았는데, 그의 부인은 범인이 우크라이나 보안국(SBU)에서 일하는 사람으로 믿었다고 주장하기도 했다. 이어 7월에는 SBU의 이반 보로니치 대령이 키예프에서 복면 괴한의 총에 피살됐다. 그는 2014년부터 러시아와의 싸움에 적극 참여했으며, SBU 특수작전센터의 제16부에서 고위직을 맡고 있었다.
러시아의 반응은 위협적이다.
러시아 국가두마(하원) 국방위원회 알렉세이 주라블레프 제1부위원장은 이날 뉴스루와의 인터뷰에서 "젤렌스키 (대통령)도 파루비 (의원)와 같은 운명에 직면할 수도 있다"고 주장했다. 그는 "파루비가 유로마이단의 주도자이고, (2014년 유로마이단 이후) 벌어지고 있는 현재의 모든 일(우크라이나 동부 내전및 전쟁/편집자)에 책임이 있기 때문"이라며 "젤렌스키 (대통령)도 다를 바 없다"고 주장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17세에 일찌감치 정계에 입문한 파루비 의원은 1991년 우크라이나 사회민족당(SNPU)을 창당(이후 당명을 '스보보다'로 개칭)했다. 2004년 오렌지 혁명에 참여한 뒤 집권한 빅토르 유셴코 대통령의 '우리 우크라이나' 당에 합류했다. 그는 2010년 봄, 의회에서 크림반도에 주둔하는 러시아 흑해 함대의 기지 연장에 관한 협정의 비준 표결을 방해한 혐의로 형사 소송을 당하기도 했다. 그는 당시 표결을 강행한 리트빈 의장에게 계란을 던지고, 연막탄을 터뜨렸다.
그는 국가안보국방위원회(국가안보실) 서기로 임명된 뒤 2014년 5월 2일 오데사에서 러시아계 반(反)마이단 시민 수십 명이 사망한 폭력 사건을 배후 조직했다는 혐의를 받았다. 그는 적극 부인했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의 2019년 대선 승리후, 5월 2일 사건(대규모 폭동을 일으키려는 목적으로 공공 무장 단체를 조직한 혐의)으로 입건했다. 하지만 이 사건은 유야무야됐고, 파루비는 기소되지 않았다.


그는 유로마이단 이후 실시된 조기 선거에서 당선된 뒤 제1 부의장을 거쳐 의장에 올랐다. 2019년 총선에서는 포로셴코 전 대통령의 유럽연대당 후보로 출마했으며, 포로셴코 전 대통령에 대한 형사 소송이 제기되자, 이에 항의하는 시위에 참여했다. 전쟁 발발 후 키예프(키이우) 지역의 한 검문소에서 군복을 입고 기관총을 든 파루비 의원의 사진·영상이 공개되기도 했지만, 지난 3년 동안 정치 일선에는 적극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