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극단적으로 말하면 유럽은 우크라이나와, 미국은 러시아와 손을 잡고 우크라이나 전쟁을 끝내겠다는 신호를 계속 보내고 있다. 미-러 알래스카 정상회담(8월 15일), 미-우크라-유럽 집단 정상회담(8월 18일)으로 조성된 평화 협상 분위기는 시간이 갈수록 식어가고 있는데, 그에 대한 각 당사국들의 입장만 보면 그렇다.
미국이 주도한 두 차례 정상회담 이후 전쟁 종식의 핵심 키워드로 떠오른 것은 러-우크라 정상회담이다. 영토든, 안보 보장이든 푸틴 대통령과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이 담판을 짓고 전쟁을 끝내라는 '마법'과 같은 이벤트다. 트럼프 미 대통령이 러-우크라, 미-러-우크라 3자 정상회담을 평화 협상의 큰 틀로 제시하면서, 2주일 내 두 정상이 만날 것이라고 장담했다. 말이 앞서는 트럼프 대통령이었지만, 푸틴-젤렌스키 대통령과 직접 만나 설득했으니, 그의 장담은 모두에게 믿음을 줄 만했다.


하지만 미국에서 귀국한 푸틴-젤렌스키 대통령은 기존의 전쟁 종식 입장에서 한 걸음도 물러서지 않았다. 당혹스러운 건 아마도 트럼프 대통령이 아닐까 짐작된다. 앞에서는 '예스(Yes)', '예스' 하다가, 뒤돌아서서는 'But'(그러나)을 덧붙이기 시작하니 그로서도 황당할 법하다. 미-러-우크라 어느 일방에게 모든 책임을 돌리는 게 적절하지 않는 이유다.
트럼프 대통령의 2주 장담은, 서방 외신의 계산으로는 1일이 기한이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지난달(8월) 31일 상하이협력기구(SCO) 정상회의가 열리는 중국 텐진에 도착했고, 회의가 끝나면 베이징으로 가 2일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정상회담, 3일 중국의 전승절 80주년 군사퍼레이드에 참석한다. 나흘간의 중국 방문 후 곧바로 블라디보스토크로 날아가 5일 동방경제포럼 본회의에 참석할 예정이다.
푸틴 대통령의 이같은 일정은 이미 공개돼 있다. 그가 자신의 텃밭에서 젤렌스키 대통령과 정상회담 이야기(약속)를 굳이 꺼낼 이유를 찾기 힘든다. SCO 정상회의에서는 적대적인 서방의 움직임을 비판하고, 트럼프 대통령과의 알래스카 회담을 참석자들에게 알려 지지를 확보했다.
뻔히 예상되는 흐름 속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2주내 러-우크라 정상회담 발언을 겨냥해, 우크라이나와 유럽 정상들은 "푸틴 대통령이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나겠다는 약속을 9월 1일까지 내놓지 않는다면, 그가 트럼프 대통령을 '갖고 논 것'으로 봐야 한다"(8월 29일 에마뉘엘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 "9월 1일까지 러시아가 양자 정상회담에 준비됐는지 기다리기로 동맹국들과 합의했다"(8월 29일 젤렌스키 대통령)고 비꼬았다. 굳이 해석하자면, 알래스카 미-러 정상회담을 폄훼하는 시도라고 볼 수 있다.

미국의 반응은 놀랄 만하다.
미 인터넷 매체 악시오스는 지난달 30일 미 백악관은 일부 유럽 지도자들이 겉으로는 트럼프 대통령의 종전 노력을 지지하면서도, 뒤로는 전쟁을 부추기는 것으로 보고 있다고 분위기를 전했다. 유럽이 우크라이나에게 영토 및 안보 협상에서 무리한 요구를 하도록 만들어 상황을 꼬이게 한다는 비판이다. 중재에 나선 미국은 러-우크라 양측의 주장을 들어본 뒤, 전쟁 수행 능력과 그에 따른 미래 예측 등을 바탕으로 현실적인 평화안(영토와 평화 교환 원칙/편집자)을 내놨는데, 유럽은 현실을 무시한 이상적인 미래를 목표로 우크라이나의 협상 의지를 꺾는다는 설명으로 이해할 수 있다. 그러면서도 유럽이 전쟁 지속에 따른 비용을 미국에 떠넘기려 한다는 게 트럼프 측근들의 시각이라고 악시오스는 전했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도 지난달 31일 "유럽 정치인들이 우크라이나가 러시아의 제안을 거부하도록 선동하고 이를 완강하게 밀어붙이고 있다"고 비난하면서 "그들은 푸틴-트럼프 대통령의 접근 방식과 대조적"이라고 주장했다. 또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와의 모든 문제를 정치적, 외교적 수단을 통해 해결할 준비가 되어 있으며, 우크라이나로부터 호혜적인 조치를 기대한다"고 덧붙였다.
결국, 전쟁의 종식 방안을 찾기 위해 트럼프 대통령의 의중을 파악하는 일만 남게 된다. 그의 시각은 한마디로 현실적이고 다층적이다. 최근 그의 발언에 고스란히 녹아 있다.
"(평화 협상에 관한 러-우크라 측의 상반된 주장에 대해) 모두가 허세를 부리고 있다. 전부 헛소리."(8월 26일 미 국무회의)
"우크라이나는 자신들보다 15배나 더 큰 사람(러시아)을 이길 거라고 생각했다. 바이든 (전 대통령)이 그런 생각을 막아서야 했다."(8월 26일 국무회의 후 기자회견)
"탱고를 추려면 두 사람이 필요하다. 젤렌스키 대통령도 무죄가 아니다."(8월 26일 기자회견)
"(트럼프 대통령은) 젤렌스키 대통령과 유럽에 대해 짜증을 내며, 그들의 요구가 비현실적이며 우크라이나가 갈등을 끝내려면 영토 일부를 내줘야 한다고 생각했다"(미 월간지 디 애틀랜틱)
"푸틴 대통령이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나지 않는 이유가 그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8월 25일 기자회견)
"서로 싫어하는 아이들이 운동장에서 싸우고 있는데, 멈추라고 하면 더 싸운다. 시간이 지나면 자연스럽게 멈출 것이다. 때로는 멈추기 전에 조금 싸워야 할 때도 있다." (8월 30일 미 보수성향의 인터넷 매체 데일리 콜러 인터뷰)
"그들(푸틴-젤렌스키 대통령)은 (잘 섞이지 않는) 기름과 식초 같다. 그들은 명백한 이유로 잘 맞지 않는다."(8월 22일 취재단과 만나)
"실망스럽다. 2주 내에 교착된 평화 협상의 책임을 누구에게 물을지 결정할 것이다."(8월 22일 기자회견)
"트럼프 대통령은 전쟁을 끝내려면 우크라이나가 "대체로 러시아의 조건에 따른" 거래를 받아들여야 한다고 믿고 있다." (8월 22일 정치전문 매체 폴리티코)
"알래스카 정상회담 이후 트럼프 대통령이 유럽보다 푸틴 대통령의 입장에 더 가까워졌으며, 유럽이 푸틴 대통령의 마음을 돌리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다(8월 22일 미 블룸버그 통신)
"침략국을 공격하지 않고는 전쟁에서 승리하는 것이 매우 어렵거나 불가능하다"(8월 21일 X 게시물)
이런 발언들을 모아 놓으면, 트럼프 대통령의 속내를 정확하게 파악하기는 더 어렵다. 다만, 그가 협상 교착의 책임을 러시아에게만 돌리지 않고 있다는 점은 분명하다.

그는 지난달 30일 미 보수성향의 인터넷 매체 데일리 콜러와의 인터뷰에서 "(미국, 러시아, 우크라이나 간) 3자 회담은 있을 것"이라면서 "양자(러-우크라) 회담은 잘 모르겠다"고 한 발 물러섰다. 운동장에서 싸우는 서로 싫어하는 아이들(러-우크라/편집자)의 예를 들며 현실을 인정한 것인지, 시간이 지나면 우열이 가려질 것이고, 그때가 되면 자연스레 싸움이 멈출 것이라고 믿는지 모르겠다. 미국이 방관한 채 전쟁을 지켜만 본다면, 우열은 분명히 가려질 것이다. 누가 봐도 시간이 갈수록 불리한 쪽은 우크라이나다.
이같은 구도에서 트럼프 대통령의 최근 발언들을 다시 음미해 보면, 시간이 좀 걸리더라도 우크라이나 영토와 안보 보장을 맞바꾸려는 그의 전쟁 종식안에 고개를 끄덕일 수 있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