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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헌법재판소의 공석을 메우기 위한 시도가 최고라다(의회)에서 좌절됐다. 러시아의 특수군사 작전(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끌려다녔던 의회가 대통령 권력에 반격을 시도했다는 분석도 일각에서는 나온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9일 "의회가 전날(8일)추천된 헌법재판소(헌재) 재판관 후보자 4명에 대한 표결을 실시, 모두 기각했다"며 "그 과정에서 집권 여당인 '국민의 종' 의원들이 항명 조짐을 보였다"고 분석했다.
우크라이나 헌법에 따르면 헌재 재판관의 정원은 18명(헌재 소장과 부소장 포함). 대통령과 의회, 대법원장이 각각 6명씩 임명할 권한을 갖고 있다. 그동안 7석이 공석이었으나 대통령 지명 재판관이 지난 6월과 9월 차례로 임명되면서 공석은 5석으로 줄어 현재 13명 체제다. 헌재의 본안 심의 정족수는 12명으로, 심의는 가능하지만 재판관 두 명이 기피 신청이라도 하면 언제든지 심의는 중단된다. 실제로 그런 일이 벌어지기도 했다. 헌재 결정은 (본안 심의 동의 최소 12명 중에서) 10명의 동의를 얻어야 한다.
헌재 기능을 정상화하려면 의회가 자신에게 배당된 재판관을 최대한 빨리 승인하는 게 최선이었다. 하지만 추천된 4명의 재판관 후보자 중 2명을 뽑기 위해 8일 실시된 의회 표결에서 누구도 과반 득표를 얻지 못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그 이유는 두 가지다. 의회에 추천된 4명의 후보자는 모두 서방 진영의 실질적인 통제를 받는 3명의 국제 전문가가 참여한 후보추천위에서 결정됐다. 국제 전문가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이 소위 국가반(反)부패기관과의 힘겨루기를 시작했을 때, 대통령 반대 노선에 선 세력으로, 이들의 지지를 받는 재판관 후보자들이 젤렌스키 정권에게는 탐탁하지 않았다. 젤렌스키 대통령 측이 이들의 선출을 적극적으로 밀어붙이지 않았다는 해석이 가능하다.


또 집권여당인 '국민의 종' 대표인 다비드 아라하미아와 예르마크 대통령실장 간의 내부 갈등에다 대통령실의 권위적인 태도에 불만을 품은 일부 여당 의원들이 반기를 들었다는 설도 나온다. 4명의 추천 후보 중 대통령실이 수용할 만한 후보조차 필요한 과반 득표를 얻지 못했다는 게 그 증거다.
'국민의 종' 의원들의 불만은 표결이 이뤄진 8일 예정됐던 젤렌스키 대통령과의 회동이 취소되면서 폭발했다고 한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당시 '국민의 종' 의원들을 향해 "파괴적인 멍청이들!"이라고 부르며 "그들을 왜 만나여 하느냐?"라고 말한 것으로 야당인 유럽연대당 소속 알렉세이(올렉시) 곤차렌코 의원이 텔레그램에 폭로했다.
'국민의 종' 소속 의원도 비슷한 분석을 내놨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국민의 종' 의원들과의 회동을 통해 국정 현안을 집권여당 측과 협의하고 있으며, 그들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사실을 보여주고자 했으나, 막판에 이를 취소했다고 한다. 이전 회동에서 의원들의 참석률이 저조했고, 일부 의원들이 회동을 앞두고 주우크라 서방 대사관에 자신에 대한 불만을 제기한 데 대해 불만을 토로했다는 것이다.
재판관 공석을 메꾸지 못하면서 향후 헌법재판소의 역할에 대한 우려가 크게 부각되는 분위기다.
스트라나.ua는 "헌법재판소는 가까운 미래에 정치적 사건에서 핵심적인 역할을 할 수도 있다"며 "우크라이나 전쟁을 종식시키기 위한 평화협정이 체결되고, 이를 위해 (국경, 언어, 중립 지위 등에 관한) 헌법 개정이 필요한 경우, 헌법재판소의 심의를 거쳐야 하는데, 재판관들의 공석이 문제가 될 수도 있다"고 지적했다.
또 젤렌스키 정권이 전후 첫 선거에서 전자투표제 도입과 같은 선거 혁신을 추진하려면, 헌법재판소로부터 합헌 결정을 받아야 하는데, 헌재의 공석이 결정적인 변수가 될 수도 있다.
우크라이나 정부가 지난 5월 미국과 체결한 '희귀광물 협정'도 합헌 여부가 쟁점이 되고 있는데, 헌재가 이를 무효화할 수 있다는 점도 우려사항이다. 희귀광물 협정은 우크라이나 정부가 핵심 내용을 기밀에 붙인 채 의회의 승인을 받아둔 상태다.
헌재의 결정이 젤렌스키 대통령의 국정 운영에 근본적인 변화를 가져올 수도 있다. 특정 개인·단체에 대한 국가안보국방위원회(우리의 국가안보실 격)의 제재 결정을 뒤집을 수 있기 때문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안보위 제재 조치를 통해 정치적 반대파와 올리가르히 등 기득권 세력을 탄압하고 재산을 몰수하는 주요 도구로 사용해 왔다. 야권 변호사들과 인권 활동가들은 이를 위헌적 조치라고 주장해 왔는데, 헌재가 이들의 주장을 받아들인다면 젤렌스키 대통령과 행정부는 가장 중요한 정치적 도구를 잃게 된다. 정계에 예상치 못한 지각 변동이 일어날 수도 있다.


루슬란 스테판추크 의회 의장은 8일 헌법 재판관 선출에 실패한 뒤 안타까움을 표명하며 헌재 재판관 공석을 메우기 위한 새로운 선출 절차를 다시 시작해줄 것을 법률정책위원회(우리 식으로는 법사위원회)에 요청했다.
이날 의회의 문턱을 넘지 못한 후보자는 △정치·법률 개혁 센터 이사회 위원이자 스테판추크 의장의 고문인 율리아 키리첸코 △법무부 국제협력 대표 사무소장 자하르 트로핀 △의회 법률 정책 문제에 대한 입법 개발 부문 수석 컨설턴트 옥사나 클리멘코 △검찰총장실 검사 타라스 침발리스티다. 이들은 2024년 5월 22일 시작된 후보자 추천 위원회의 심의 등 1년 이상의 까다로운 과정을 거쳐 재판관 후보자로 의회에 추천됐다.
이날 선출되지 못한 율리아 키리첸코 후보자는 "헌법재판소가 13명의 재판관으로 운영은 가능하지만, 재판관 13명 중 10명의 지지를 얻은 것은 18명 중 10표를 얻는 것보다 훨씬 어렵다"며 의회의 표결에 아쉬움을 표시했다.
우크라이나의 헌법 재판관 후보자 추천은 6명의 국내외 전문가들로 구성된 후보자 추천위의 심사로 시작된다. 6명의 심사위 중 3명은 국회과 대통령, 판사평의회에서 각 1명씩, 나머지 3명은 국제 전문가로 구성된다. 국제 전문가 도입은 우크라이나의 유럽연합(EU) 가입 조건에 포함된 사항이다. 후보 추천위는 올라온 후보자들을 대상으로 도덕적 자질과 법적 역량을 평가해 가부를 결정한다.
그러나 후보 추천위가 최종 결정권을 갖는 의회와의 소통에 적극 나서지 않아 불만을 사기도 했다. 데니스 마슬로프 의회 법률정책 위원장은 "후보추천위가 부여된 권한을 넘어서고 있으며, 의회와의 소통도 무시하고 있다"고 불만을 터뜨리기도 했다.
'국민의 종' 의원들도 "대통령이 우리에게 사기를 북돋아주기는커녕 등 뒤에서 험담이나 하고 있다"고 불평했다. 특히 대통령이 의회를 무시한 장관에게 벌금을 부과하는 법안 11387호에 대해 석연치 않은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한 데 불만이 크다고 한다.
우크라이나 전쟁이 협상을 통해 극적으로 타결되더라도 후속 조치인 헌재 결정에서 발목이 잡힐 수도 있다는 점에서 우크라이나 헌재 공백이 하루빨리 메꿔지기를 기대한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