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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에서 열린 APEC 정상회의가 1일 끝났다. 21개국 정상들이 '경주 선언'을 채택하고 'CEO 서밋'(기업인 회의)에서는 1,700여 명의 글로벌 CEO와 경제 리더가 모였다. 엔비디아의 젠슨 황 CEO, 삼성전자 이재용 회장, 현대차그룹 정의선 회장이 함께한 ‘깐부 치킨 회동’은 APEC의 장외 무대에서 최고의 화젯거리였다.

정상회의이지만 러시아에서는 푸틴 대통령 대신 알렉세이 오베르추크 부총리가 참석했다. 그가 전용기를 타고 김해공항에 도착하는 모습과 지난(9월) 31일 이재명 대통령 부부의 영접을 받는 모습이 언론 카메라에 포착됐다.
APEC 정상회의를 앞두고 관심을 끈 것은 러시아 언론에 보도된 안드레이 루덴코 러시아 외무차관의 인터뷰다. 루덴코 차관은 지난(10월) 27일 오베르추크 부총리의 APEC 참석에 맞춰 현지 유력 일간지 이즈베스티야와 가진 인터뷰에서 "한국과 (항공) 직항편을 재개하는 방안을 논의 중"이라며 양국 항공사가 접촉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는 "많은 부분이 (한국) 당국의 입장에 달렸다"며 성과가 도출되기를 기대했다.


한-러 양국의 하늘길을 잇는 직항편은 2022년 2월 러시아의 '특수군사 작전'(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직후 서방의 대(對)러시아 제재 조치와 맞물려 양국 항공사들이 운항을 중단하면서 끊어졌다. 미국과 유럽 등 서방 진영은 당시 항공 분야를 대러 제재 조치에 포함시켰고, 러-서방 간에는 영공 통과 금지 조치가 내려졌다.
이후 러시아에서 몇 차례 한국과의 직항편을 재개할 것이라는 보도가 나왔으나, 희망하는 수준에 불과했다.
지난해 12월 만난 게오르기 지노비예프 주한 러시아 대사도 "한-러 직항편 재개를 양국 관계에서 가장 먼저 풀어야 할 현안 중 하나"라고 말했다. 지노비예프 대사는 기회가 있을 때마다 문화·인도주의·인적 교류의 복원을 위해서라도 한-러 직항 노선을 재개해야 한다는 의지를 표명해 왔다.

이즈베스티야지는 "지난 9월 미국 뉴욕에서 열린 유엔총회에서 조현 외교장관이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과 만나 러시아 내 한국 기업의 활동에 대한 우호적 여건 조성을 요청했다"고 전하면서 "APEC 정상회의 기간에 열리는 교통 연결성 주제의 포럼에서 직항편 재개 문제가 논의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했다.
하지만, 한-러 직항편에 관한 구체적인 논의가 진행됐다는 소식은 아직 들려오지 않고 있다. 루덴코 차관의 발언 역시 '희망 사항'에 불과했다는 뜻이다.
직항편 재개를 가르막는 가장 큰 장애물은 루덴코 차관이 지적한 대로, 우리나라의 대러 정책이다. 러시아 측 인사들은 한국이 러시아에 제재를 가한 국가 중 가장 우호적인 나라로 꼽고 있지만, 미국 등 서방의 대러 제재 조치가 해제되지 않는 한, 우리나라가 독자적으로 움직이기는 쉽지 않는 게 현실이다. 이재명 대통령도 전 정권에 비해 중국과 러시아에 상대적으로 우호적이라는 평가를 받더라도, 미국이 대러 제재에 관한 입장을 최종적으로 결정하기 전에는 독자적으로 제재 완화 관련 정책을 내놓기 어렵다는 게 전문가들의 판단이다.

곧 모스크바로 부임할 이석배 주러 대사도 대사 내정 후 "양국 간에는 풀어야 할 복잡한 현안들이 쌓여 있다"며 직항편 재개 문제를 그중의 하나로 꼽았다. 이 대사는 "우리나라가 단독으로 결정할 사안이 아니다"는 데 동의하면서 "쉽지 않다"고 내다봤다.
직항편 재개가 결정될 경우, 러시아 국영 아에로플로트와 함께 가장 먼저 한-러 노선에 항공기를 띄울 대한항공 측도 "운항 여건 마련 시 검토하겠다"는 신중한 입장이라고 한다.
국내 항공업계는 러시아 항로의 재개를 간절히 원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비행거리 및 연료비 절감과 운항 시간 단축, 승객 편의성 향상 등 모스크바는 물론, 파리와 프랑크푸트트 등 유럽 노선에서 기대하는 효과가 크기 때문이다.
항공업계에 따르면 러시아 항로가 막힌 현재, 우회 항로를 이용해야 하는 유럽행 항공편의 비행시간은 기존(시베리아 항로 이용)보다 편도 기준 1시간 30분에서 최대 2시간 45분가량 늘어난 상태다. 장거리 노선의 경우 운항 시간이 길어지면서 유류비 부담도 이전 대비 약 15% 증가한 것으로 추정된다. 늘어난 비행시간은 곧 유류비 증가로 직결된다.
유류비는 항공사의 고정비용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부분. 대한항공의 경우 지난해 기준 총 영업비용 15조7605억원 중 유류비가 4조9808억원으로 전체의 31.6%를 차지했다. 대한항공의 영업이익률이 유가에 달려 있다는 건 항공업계에서는 상식에 속한다.
전문가들은 한-러 직항편의 조속한 재개에 아직은 부정적이다.
황용식 세종대 경영학과 교수는 루덴코 차관의 발언이 알려진 뒤 국내 언론에 "이번 APEC 정상회의에서 관련 논의가 있을 수도 있지만, 미국과의 관세 협상조차 마무리되지 않은 상황에서 러시아 문제를 동시에 다루는 것은 부담이 크다"고 짚었다.
김광일 신라대 항공운항학과 교수도 "서방 진영이 러시아에 대한 제재를 유지하고 있는 상황에서 러시아와의 경제 협력이나 항공 노선 재개를 추진할 경우, 얻는 이익보다 서방 사회로부터 외교적 고립을 초래할 위험이 더 크다"고 지적했다.
우크라이나 전쟁 이전까지 대한항공은 아에로플로트와 함께 인천·김포·부산·제주에서 모스크바·상트페테르부르크·블라디보스토크를 오가는 직항 노선을 운영했다. 또 제주항공, 티웨이항공, 이스타항공, 에어부산 등 다수의 저비용항공사(LCC)도 러시아 직항편을 띄웠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