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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차가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등 러시아 자산을 현지 업체에 넘기면서 걸어놓은 재매수(바이백) 옵션의 행사 시한이 1달여 앞으로 다가왔다. 러시아 현지에서도 현대차가 과연 이 옵션을 실행할지 지켜보고 있다.
러시아 자동차 전문 매체 오토뉴스에 따르면 현대차 공장이 위치한 상트페테르부르크의 알렉산드르 시토프 시(市) 산업 정책, 혁신및 무역 위원회 위원장은 지난 10월 말 지역 매체 폰탄카와의 인터뷰에서 "(현대차 공장에서 생산되는) 솔라리스 자동차의 운명은 올해 12월에 결정될 것"이라며 "우리는 그때까지 현대차 자산을 인수한 AGR자동차그룹(인수 계약을 체결한 아트 파이낸스의 후신)의 한국 파트너(현대차)가 무슨 말을 할지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AGR그룹 측은 옵션에 관한 어떤 질문에도 답변을 계속 거부하고 있다고 한다.

현대차는 2023년 12월 AGR그룹 측에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 등 러시아 자산을 1만 루블(당시 약 14만원) 매각했고, 이듬해(2024년) 2월부터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에서는 '솔라리스' 브랜드의 자동차 조립이 시작됐다.
현대차의 바이백 옵션 적용 시한을 앞두고 현지에서 들려오는 소식은 불길하다.
현지 매체 로시스카야 가제타(RGRU)의 자동차판 등 현지 언론에 따르면 AGR자동차그룹은 독일 폭스바겐의 칼루가 공장에서 생산 중인 새 브랜드 '테넷'과 현대차 공장의 '솔라리스'에 대한 경영 책임을 맡을 새 CEO로 현지 자동차 업체 아프토바즈(AvtoVAZ) 출신의 안드레이 카라긴을 19일 임명했다. 기존의 알렉세이 칼리체프 CEO는 신규 프로젝트의 개발에 집중하기로 했다. 경영 일선에서 물러난 것으로 해석된다.
칼리체프는 현대차 러시아 법인에서 상무(러시아법인 사업 총괄)로 근무하다 AGR그룹의 첫 CEO로 발탁된 인물이다. 그의 존재는 현대차의 바이백 옵션 실행 이후 현대차의 우군이 될 것으로 기대됐는데, 갑작스레 물러난 것이다.

카라긴 새 CEO는 자동차 업계에서 20년 이상, 또 다국적 기업 및 합작 투자 회사에서 근무한 경력을 갖고 있다. 러시아 톨리아티 공과대학을 졸업한 뒤 러시아 대통령 국가경제행정아카데미(RANEPA)에서 경제학 학위를, 프랑스 그르노블 경영대학원에서 MBA 학위를 취득했다. 2024년 아프토바즈 생산 담당 부사장에서 AGR 그룹의 칼루가 자동차 공장 책임자로 스카웃됐다.
칼리체프 전CEO는 후임자에 대해 "풍부한 경험, 경영 능력, 그리고 전문성을 겸비하고 있다"며 "생산 공정의 조정 및 개발에 대한 그의 지식은 AGR그룹의 발전에 크게 기여할 것"이라고 평가했다. 새 CEO 발탁은 AGR그룹의 생산 역량 기반을 강화하고, 지주회사 운영을 확대하려는 의도에서 나온 것이라는 현지 분석과 일치한다. 현대차로서는 CEO 교체를 찜찜하게 여길 수밖에 없다.
현대차 인수 초기부터 AGR그룹은 뭔가 수상쩍었다. 인수 주체가 신생 법인 '아트 파이낸스'였는데, 독일의 폭스바겐 러시아 자산을 인수한 '아발론'의 자회사로 보도됐다. 당시 아트 파이낸스는 아발론과의 관계를 적극 부인했다. 하지만 아트 파이낸스가 AGR그룹으로 명칭을 바꾼 뒤 아발론이 이 그룹(지주회사 격)의 산하로 들어왔다. 결국 같은 회사였던 셈이다.
AGR그룹은 공식적으로 러시아에서 자동차와 부품을 제조 및 판매하고 각종 서비스를 제공하는 회사다. 옛 폭스바겐 자동자 칼루가 공장(Грабцево 그라브체보 기술 공단 소재)과 상트페테르부르크의 현대차 공장(Каменка 카멘카 산업단지 소재)와 (현대차가 인수한) GM 자동차 슈샤리 공장(Шушары 슈샤리 산업단지 소재), 그리고 체호프에 있는 자동차 부품 및 액세서리 창고 등을 갖고 있다.

더욱 불길한 소식은 AGR그룹이 칼루가 공장과 슈샤리 공장에 수백억 루블의 신규 투자를 진행하겠다는 것이다.
현지 경제 전문지 베도모스티에 따르면 AGR자동차그룹이 상트페테르부르크에 있는 전 GM 슈샤리 공장의 시설 정비를 위해 371억 루블을 투자할 계획이다. 칼루가 전 폭스바겐 공장에는 506억 루블을 투자한다. 안톤 알리하노프 산업통상부 장관은 러시아 국가두마(하원)에 보낸 서한에서 AGR그룹이 자동차 전자 장치와 자동 변속기, 엔진 등을 현지 생산하기 위해 신규 투자를 단행하기로 약속했다고 확인했다. 또 AGR그룹은 이미 칼루가 전 폭스바겐 공장에 100억 루블을, 상트페테르부르크 공장에는 약 70억 루블을 투자했다고 밝혔다.

그 결과, 칼루가 공장에서는 지난 2월부터 중국 자동차 '체리'를 기본으로 한 새 브랜드 '테넷' 차량이 생산되고 있다. 테넷 T4, T7, T8 등 세 가지 SUV 모델이다. 테넷은 지난 10월 러시아 자동차 시장 판매량 상위 10위권에 처음 진입했다.
아브토스타트(Avtostat) 통계에 따르면, 현대차 상트 공장에서 출고되는 자동차 브랜드 '솔라리스'의 판매량은 올 1월~10월 전년 대비 2.3배 증가한 2만 7,311대를 기록했다.
이제 남은 곳은 미국 자동차 회사 GM이 소유했던 슈샤리 공장이다. 2021년 현대자동차에 인수된 뒤 공장 가동이 중단된 곳이다. 이 공장의 재가동에 관한 여러 관측이 나오기는 했지만, 2025년 여름 공장의 주차장에서 '재쿠 J8' 차량이 목격됐을 뿐, 공장 가동에 관한 공식 발표는 나오지 않았다.
당초 현대차는 슈사리 GM공장을 인수한 뒤 최소 360억 루블을 투자해 2023년 공장을 가동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우크라이나 전쟁과 이에 따른 현대차의 러시아 철수로 투자는 무산됐다.
데니스 만투로프 러시아 제1부총리는 지난 10월 말 리아 노보스티와의 인터뷰에서 슈샤리 공장이 2026년 초 가동을 재개할 것이라고 밝혔다. 만투로프 제1부총리의 발언과 AGR그룹의 슈사리 공장 투자 계획을 종합하면, AGR그룹이 생산 시설을 정비해 중국산 '체리' 자동차의 자매 브랜드인 '재쿠'의 조립 생산을 계획하고 있다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베도모스티는 소식통들을 인용, AGR그룹이 스베르방크와 가즈프롬방크와 총 약 1,000억 루블 규모의 신디케이트 신용 한도를 개설하기로 합의했다고 보도했다. 차입 자금은 주로 AGR그룹의 경영, 특히 중국산 자동차 부품 구매에 사용될 예정이라고 설명했다. GM 슈샤리 공장에서 조립될 '재쿠' 모델의 부품 수입 자금을 확보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하지만 AGR그룹 측이 이에 대한 논평을 거부했다고 한다.
자동차 전문 애널리스트 블라디미르 베스팔로프의 전망도 주목을 끈다. 그는 "AGR그룹이 부분적으로 완공된 인프라를 갖춘 부지(GM 슈샤리 공장/편집자)를 확보했다"며 "새로운 투자는 기존 시설을 고도로 현지화된 생산 시설로 리모델링하려는 회사의 계획을 알려주는 것"이라고 해석했다. 그는 또 (옛 GM) 공장의 현지화 과정을 통해 재활용 수수료 환급과 세금 감면, 정부 지원 프로그램 등 다양한 혜택을 받을 것으로 내다봤다. 러시아 산업통상부가 지난 10월 칼루가 폭스바겐 공장에서 생산된 '테넷' 차량을 택시로 사용할 수 있는 현지화 차량 목록에 포함시킨 게 대표적이다. GM 공장에서 생산된 '재쿠' 모델도 정부로부터 비슷한 혜택을 기대할 수 있다.
AGR그룹이 '체리'와 '재쿠'의 생산을 선택한 것은 합리적인 판단으로 현지 전문가들은 보고 있다. 러시아 시장에서 경쟁력이 있고, 수요 잠재력이 충분하기 때문이다. 아프토스타트 통계에 따르면, 체리는 올해 1월~10월 판매량은 29.2% 감소한 9만4,440대를 기록하며, 러시아 현지 브랜드 '라다'와 중국산 '하발'에 이어 판매량 3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10월에는 차량 판매가 6,566대에 그쳐 전년 동기 대비 56.6% 감소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체리' 자동차 회사는 러시아 시장 철수에 대비해 칼루가 공장과 슈샤리 GM공장에서 조립 생산 체제를 갖춘 것으로 아프토스타트의 세르게이 우달로프 이사는 주장했다. 그는 '테넷'과 '재쿠'가 앞으로 러시아 시장에서 체리 수입차를 대체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체리는 지난 9월 서방의 제재 가능성을 우려해 2027년까지 러시아 내 사업 규모를 '무시할 수 있는' 수준으로 줄이겠다고 발표한 바 있다. 러시아 시장 철수를 앞두고 현지 조립 생산 체제를 갖추겠다는 뜻이다. 그렇다면 현대차가 상트 공장과 슈샤리 GM공장을 되찾을 수 있는 기회가 줄어들지나 않을까 우려된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