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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 초기에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의 '입 역할'을 맡았던 알렉세이(올렉시) 아레스토비치 전 고문은 지난 12일 에너지 기반 시설(원전 기업 에네르고아톰)에 대한 권력형 비리 스캔들이 터진 뒤 "젤렌스키 (대통령) 정권의 종말이 시작됐다"라고 주장했다. 그는 유튜브 채널에서 "젤렌스키 (대통령)는 11월에 끝난다"며 "우크라이나 국가반부패기관(NABU·나부와 SAPO·사포)에 의한 권력형 비리 조사는 미국이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러시아와 평화 협상을 타결하도록 압력을 가하는 수단"이라고도 했다.
우크라이나 국가반부패국(NABU)은 이틀 전(10일) 에너지 부문 부패 사건에 대한 대규모 특별 수사 결과를 발표했다. 이때만 해도 이 스캔들이 젤렌스키 정권의 핵심을 곧바로 찌르고 들어올 줄은 거의 예상하지 못했다. 일각에서 제기된 '젤렌스키 대통령 겨냥,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 제거'라는 주장에 반신반의했다.
하지만, 그로부터 보름여 만에 안드레이(안드리) 예르마크 실장이 사임하는 정치적 대격변이 현실화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와 rbc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나부(NABU)가 28일 예르마크 대통령 실장의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에 들어가자, 예르마크 실장은 사의를 표명했으며, 이날 저녁 젤렌스키 대통령이 그의 사의를 수락했다.

나부(NABU)는 예르마크 실장이 에네르고아톰과 연관 자회사들로부터 정부와 계약 금액의 10∼15%에 달하는 리베이트를 받아온 비리 사건에서 핵심 역할을 한 것으로 보고 있다. 나부는 "1년 6개월간의 수사 끝에 약 1,000건의 음성 녹음 파일을 확보했다"며 주범 격인 대통령 측근 사업가 티무르 민디치의 아파트에 대한 도청 자료를 일부 공개하기도 했다. 이 녹음 파일에는 '알리바바'라는 인물이 등장하는데, 예르마크 실장이라는 의혹이 제기됐다. 하지만 그는 비리 연관성을 극구 부인했다.
우리 식으로 해석하면, 예르마크 실장이 부패 스캔들로 대통령에게 더 이상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 스스로 사의를 표명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또 그가 미국이 내놓은 28개항의 평화계획(미국의 새 평화안)에 대한 제네바 미-우크라 후속 협상의 대표를 맡았다는 점에서 원만한 평화 협상을 위해 자리를 비켜준 것으로도 해석 가능하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28일 예르마크 실장의 사표를 수리하면서 "모든 관심이 외교와 국방에 집중될 때 내부적으로는 단결된 힘이 필요하다"며 "(그가 물러난 만큼) 더 이상 의문을 제기하지 않기를 바란다"고 말했다. 나아가 예르마크 실장이 평화 협상 과정에서 항상 애국적인 입장을 정확히 제시해 준 데 감사하며 '대통령실의 재정비'를 선언했다.
대통령과 함께 국정 운영의 한 축인 최고라다(의회)를 장악하고 있는 집권 여당 '국민의 종'의 데이비드 아라하미아 대표는 텔레그램 채널을 통해 젤렌스키 대통령의 예르마크 실장 해임 결정을 지지하며 "대외적으로 강력한 입지를 확보하려면 국내적으로 강해져야 한다"고 대통령의 해임 취지를 옹호했다. 아라하미야는 그동안 예르마크 실장을 견제해온 대표적인 인물로 알려져 있다. 아라하미아 대표의 한 측근 의원은 "예르마크 실장이 사임하면, 부패 스캔들로 흔들리던 국민의 종 의원들이 안정을 되찾고 2026년 예산안 등 정부의 정책을 지지할 것"으로 내다봤다.

예르마크 실장의 해임에 현지 언론이 호들갑을 떠는 것은 그의 정치적 역할및 비중 때문이다. 역으로 말하면 그의 해임으로 젤렌스키 대통령이 받는 타격은 상상외로 크다는 뜻이다. 그는 러시아의 특수군사 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을 계기로 내려진 계엄령과 총동원령 하에서 '일인지하 만인지상'(一人之下 萬人之上)이라는 옛말에 어울리는 확고한 2인자였다.
두 사람의 인연은 15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예르마크가 변호사에서 TV 제작 사업으로 진출하던 중, 당시 유명 코미디언이자 배우였던 젤렌스키 대통령을 만났다. 이후 젤렌스키 대선 캠프에 합류했고, 2019년 대선 승리와 함께 대통령실에 들어가(보좌관) 외교 업무를 총괄하다가 2020년 2월 실장 자리를 꿰찼다. 그는 우크라이나 전쟁이 발발하기 전부터 러시아-유럽안보협력기구(OSCE)-우크라이나 3자 연락 그룹(TCG)의 우크라이나 대표단을 이끌기도 했다. 전쟁이 발발한 뒤 서방의 지원을 얻기 위해 동분서주하는 대통령을 동행하는 등 외교정책을 포함해 국정 운영을 실질적으로 좌우해 왔다.
우크라이나 평화협상의 이론적 기초가 된 '영토와 평화의 교환 원칙'을 처음으로 제시한 헨리 키신저 전 미 국무장관을 생전에 찾아가 고견을 들을 때도 그는 젤렌스키 대통령 곁에 있었다. 빛(권력)이 강한 만큼 그림자(적)도 짙은 게 자연의 이치. 그를 노리는 세력이 주변에 많이 생겨난 것은 당연한 결과다. 예르마크 실장의 사임에 우크라이나 안팎에서 '늦었지만 다행'이라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그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최고라다(의회) 반부패위원회 위원장인 아나스타샤 라디나는 그의 사임에 대해 "늦었지만 그래도 다행"이라고 밝혔고, 영국 일간 가디언 등은 NABU의 압수수색 이후, 젤렌스키 대통령이 그를 해임할 가능성은 낮지만 정치적으로 볼 때 해임하는 것이 가장 현명한 선택이라고 썼다.
미국 일간 뉴욕타임스(NYT)는 정부 불신임과 같은 의회의 반란을 막기 위해 그가 물러났을 것으로 추정했다. 의회내 다수세력을 점하는 '국민의 종' 일부 의원들이 예르마크 실장의 사임을 요구하며 대통령실에 반발할 조짐을 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사임에 관해 재미있는 논평은 미국과 평화협상을 하는 키릴 드미트리예프 러시아 대통령 특사의 손에서 나왔다. 트미트리예프 특사는 '민디치 도청 파일'에 예르마크 실장이 '알리바바'로 등장하고 있다는 점에 빗대 "알리바바는 가고, 도적 40명만 남았다"고 텔레그램에 썼다. NABU가 그의 자택을 수색할 때는 아예 "열려라 참께"(Сезам, откройся!)라는 표현이 나오기도 했다.
그의 사임을 앞두고 대통령실과 반부패세력 간에 벌어진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 국면도 현지 언론에서는 감지된다.
스트라나.ua는 28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기사 중 '알리바바의 해임'(Увольнение Али-Бабы)이라는 코너에서 "전날(27일)부터 예르마크 실장과 우메로프 국가안보국방회의(우리의 국가안보실 격) 서기(장관급, 사무총장)이 부패 혐의로 입건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았다"면서 "오늘은(28일) 거꾸로 대통령실에서 알렉산드르(올렉산드르) 클리멘코 반부패특별검찰청(SAPO) 청장에 대한 입건을 준비 중이라는 보도가 나왔다"고 전했다. 대통령실과 반부패기관이 서로 상대편의 핵심 인사를 겨누고 있었다는 이야기다.
예르마크 실장의 주도 하에 대통령실이 휘하의 법집행기관(보안국·SBU와 국가수사국·SBI)를 통해 NABU와 SAPO에 대한 반격에 적극 나섰다는 소문이 그 전부터 돌았다는 점을 감안하면, 27, 28일 양일간 양측이 서로 상대를 잡기 위해 긴박하게 움직인 것으로 보인다. 예르마크 실장의 자택에 대한 압수수색의 이유가 공식적으로 발표된 것은 없지만, 그의 혐의가 에네르고아톰 뇌물 수수가 아니라, 소위 '민디치 테이프'에 등장했던 키예프(키이우) 교외의 '고급 별장촌'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사실이라면 NABU는 이미 수사가 어느 정도 끝난 '고급 별장촌' 수사 건으로 예르마크 실장에게 선제공격을 가한 셈이다. 키예프 별장촌은 반부패기관에 의해 이미 구속된 체르니쇼프 전 부총리가 건설을 추진한 것으로, 4채 중 2채가 대통령과 대통령실장의 몫이라는 의혹이 제기된 상태였다. 그 과정이야 어떻든, 결과적으로 대통령실과 반부패기관 간의 기세 싸움에서 대통령실의 완패라고 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예르마크 실장의 사임으로 젤렌스키 대통령의 정치적 위상 약화와 권력 지형의 변화는 불을 보듯 뻔하다. 부패척결 세력과 야당, 일부 언론, 올리가르히 등으로 구성된 반(反)젤렌스키 세력은 전시(戰時)라는 비상사태 하에서 권력을 강화해온 대통령의 힘을 빼기 위해 더욱 밀어붙일 태세다. 이들의 최종 목표는 야당을 포함하는 범국민전시정부를 구성해 대통령을 '존재하나 통치하지 않는다는 영국 여왕'처럼 만든다는 것이다. 이 길로 나아가는데 가장 큰 걸림돌은 예르마크 실장이었는데, 이제 그가 해임됐다.
젤렌스키 대통령과 대통령실도 손을 놓고 있지는 않을 것이다.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미 대통령실 재정비를 선언하는 등 국정 전반에 대한 통제력을 놓치지 않기 위해 노력할 것으로 전망된다.
현지 언론들은 소식통을 인용해 율리아 스비리덴코 총리, 키릴 부다노프 군정보총국(GUR) 국장, 미하일 표도로프 제1부총리, 데니스 슈미갈 국방장관(전 총리), 파블로 팔리사 대통령실 부실장 등을 유력한 차기 실장 후보로 올렸다. 예르마크 실장의 고문 격인 티모페이 밀로바노프는 스비리덴코 총리가 대통령 실장, 페도로프 제1부총리가 총리 직무대행을 맡을 것이라고 주장했다.
러시아내 CIS 전문가인 아르카디 두브노프는 러시아 매체 rbc와의 인터뷰에서 "예르마크 실장의 사임이 젤렌스키 대통령을 약화시키기보다는 오히려 강화할 것"이라며 "최근 몇 년 동안(전시 기간) 예르마크 실장이 '(개의) 꼬리가 몸통을 흔드는' 것처럼 대통령을 좌지우지했다"고 주장했다. "꼬리를 제거하면 개가 독립적으로 행동할 수 있을 것"이라는 게 그의 논리다. 그는 또 "체스에서 말 하나를 희생함으로써 젤렌스키 (대통령)는 게임에서 이기지는 못하더라도 최소한 지지 않으려고 노력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하지만 궁극적으로는 예르마크 실장이 지금까지 구축해온 젤렌스키 대통령의 친정 체제가 무너질 것이라는 예측이 유력하다. 스비리덴코 총리 정부도, 우크라이나 정보기관(SBU)도, 검찰청도 대통령실보다는 집권여당(국민의 종)과 의회의 분위기에 더 귀를 기울이기 시작했다는 분석이 나온다.
가장 결정적인 타격은 대통령의 권위 상실이다. 우리 식으로는 '레임 덕'에 들어갔다고 볼 수 있다. 반부패기관의 수사와 여론의 향배, 야당의 정치적 압력 등에 의해 대통령의 오른팔이 잘려나간 만큼, 젤렌스키 대통령이 더 이상 자신의 측근을 지킬 수 없다는 신호를 국가 기관 전체에 알린 셈이나 다름없다. 여기에 측근들의 부패 사건이 대통령의 동의, 혹은 최소한의 묵인이 없었더라면 있을 수 없다고 믿는 사회적 여론은 더욱 치명적이다. 자칫하면 대통령도 부패 혐의로 기소될 수 있다.
스트라나.ua는 권력의 추가 앞으로는 대통령실에서 의회로 옮겨갈 것으로 본다. 사실상 의회를 통제해온 예르마크 실장의 사임으로 대통령과 의회를 이어주는 통로는 사라졌고, 의회가 정부나 각료 불신임안을 낼 가능성이 상당히 높아졌기 때문이다.

훨씬 더 극단적인 시나리오도 가능하다. '국민의 종'이 분열해 의회 다수가 야당 쪽으로 넘어가는 경우다. 정부 불신임 투표가 통과되고, 젤렌스키 대통령에게 사실상 통제를 벗어난 '국민통합'용 정부(범국민전시내각)를 구성하라는 압력이 가해질 수도 있다. 젤렌스키 대통령에게는 최악의 상황이 전개된다.
우크라이나 국민들에게는 이보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이 전쟁과 평화 협상에 미칠 잠재적 영향이다. 예르마크 실장의 사임과 그에 따른 권력의 격변은, 예산 편성과 에너지 확보, 국방 조달, 군대와 사회 분위기 등 기존의 전시 체제에 큰 영향을 미칠 수밖에 없다. 특히 젤렌스키 대통령이 예르마크 실징과 함께 지금까지 수락을 거부해 온 미국의 새 평화안에 대한 입장이 바뀔 수 있다. 평화 협상에서 미국의 압력이 점점 더 커지면서 핵심 쟁점의 양보는 물론, 평화협정의 최종 서명자가 러시아측의 요구대로 젤렌스키 대통령에서 제3의 인물(의회 의장)으로 바뀔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 의장직은 앞으로 다른 인물(2022년 3월 러시아와의 평화협상 대표를 맡은 아라하미아 국민의 종 대표/편집자)이 맡을 수도 있다. 루슬란 스테판추크 현 의장은 친(親)예르마크 성향으로, 우크라이나의 영토 양보에 적극 반대하는 인물이다.
이와 관련, 주목할 것은 예르마크 실장에 대한 NABU의 압수 수색이 댄 드리스콜 미 육군장관(이후 우크라이나 대통령 특사로 임명/편집자)의 키예프 방문 직전에 이뤄졌다는 사실이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드리스콜 장관은 우크라이나 측에 미국 새 평화 계획에 따른 영토 양보, 특히 돈바스 주둔 우크라이나군 철수의 수용을 강력하게 요구했는데, 예르마크 실장은 사임 전날(27일)까지 "젤렌스키가 대통령으로 있는 한, 영토 문제는 양보하지 않을 것"이라고 선언했다. 미국이 새 평화안을 내놓은 시점이 에너지 부패 스캔들이 터진 직후였고, 예르마크 실장에 대한 압수수색과 사임이 그의 '양보 불가' 발언 직후라는 점에서 그 기묘한 시점을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예르마크 실장의 사임으로 제네바 미-우크라 후속회담의 우크라이나 협상 대표가 사라지고 그 자리를 친(親)미 성향의 우메로프 안보회의 서기가 맡았다. 우메로프 서기 등 우크라이나 협상팀은 미국 플로리다주 마이애미에서 미국과 협상을 계속하기 위해 29일 우크라이나를 떠났다. 이 대표단에는 안드레이 흐나토프 우크라이나군 참모총장과 정보기관, 외무부 고위 관계자들이 포함된 것으로 알려졌다. 미국 측에서는 루비오 국무장관과 위트코프 대통령 특사, 트럼프 미 대통령의 사위 쿠슈너가 나선다.
미-우크라 협상 팀은 제네바 후속 회담에서 논의된 내용을 바탕으로 협상을 이어갈 것으로 알려졌다. 제네바 회담 결과는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로이터 통신과 미 CBS 뉴스는 "우크라이나가 대부분의 항목에는 동의했지만, 젤렌스키 대통령이 11월 말까지 가장 민감한 문제들(영토 양보, 전후 병력 유지 수준, 나토 가입 금지 등/편집자)을 트럼프 대통령과 직접 논의하기를 원했다"고 보도했다.
푸틴 대통령은 전날(27일) 미국으로부터 제네바에서 논의된 새로운 버전의 문서의 받았다며 "앞으로 평화 합의의 기반이 될 것"으로 기대했다. 새 버전에 대해 정확하게 알려진 것은 없지만, 외신들은 기존의 29개 항에서 19항으로 줄었다고 전했고, 트럼프 대통령은 22개 항으로 조정됐다고 말해 서로 엇갈린 상태다.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러시아는 현단계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아닌, 미국과 협상할 것"이라고 선을 그었다. 스티브 위트코프 미 대통령 특사는 마이애미에서 우메로프 안보회의 서기 등 우크라이나 대표단과 만난 뒤 모스크바를 찾아 그 내용을 공유하고, 협의할 예정이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