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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크라이나 전쟁에서 러시아와 한 통속으로 꼽히는 이웃 국가 벨라루스가 러시아보다 먼저 미국과 화해의 길을 빠르게 걷고 있다.
알렉산드르 루카셴코 벨라루스 대통령은 존 콜 미 대통령 특사와 만난 뒤 13일 칼륨 산업(정확하게는 벨라루스의 칼륨 비료 생산업체인 '벨라루스칼리')에 대한 미국의 제재 해제 발표에 맞춰 노벨평화상 수상자 등 정치범 123명을 사면·석방했다. 루카셴코 대통령이 2025년 들어 취한 아홉 번째 사면이다.
전날(12일) 벨라루스를 방문해 루카셴코 대통령과 회담한 존 콜 특사는 수감자 사면 발표 몇 시간 전에 "벨라루스산 칼륨(비료)에 대한 미국의 제재가 해제됐다"며 "지속적인 대화를 통해 양국 간 관계를 정상화하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와 rbc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이번에 석방된 주요 인사로는 2022년 옥중에서 노벨평화상을 받은 벨라루스 인권활동가 알레스 비알리아츠키와 2020년 대선 부정선거에 항의하는 대규모 시위를 이끈 마리아 콜레스니코바, 대선에 나섰다가 투표소가 아니라 감옥으로 끌려갔던 대선 후보 빅토르 바바리코 전 벨가즈프롬뱅크 회장(CEO) 등이 가장 먼저 꼽힌다.
비알리아츠키는 벨라루스의 대표적 반체제 인사다. 루카셴코 대통령 체제에 반대하는 대규모 시위가 벌어진 1996년 '뱌스나'라는 단체를 만들어 투옥된 반체제 인사들과 가족들을 지원하는 데 앞장섰다. 그는 폴란드와 리투아니아 등에 계좌를 개설해 수감된 정치범들을 위한 후원금을 모았는데, 탈세 혐의로 2011년 11월 4년 6개월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가석방됐다. 하지만 2020년 대선 부정선거 항의 시위가 발발하자 다시 감옥에 갇혔다.



콜레스니코바는 2020년 벨라루스 대선에 나섰다가 감옥에 간 바바리코 전 벨가즈프롬뱅크 회장의 캠프에 참여했으나 그의 대선 출마가 좌절되자, 여성 대선 후보인 스베틀라나 티하노프스카야를 도와 대선을 치렀다. 이후 대규모 반정부 시위 과정에서 티하노프스카야 후보는 해외로 몸을 피했고, 그녀는 현장에 홀로 남은 상징적인 존재가 됐다. 2021년 9월 형법 제357조 1항(권력 장악·쿠데타 음모) 등의 위반 혐의로 11년형을 선고받았다.
바바리코는 지난 2000년부터 무려 20년간 러시아 에너지 기업 가스프롬과 연계된 '벨가즈프롬은행' 회장직를 맡아 경영하던 중 2020년 5월 대통령 선거 출마를 선언했다. 그러나 그 다음달(6월) 벨라루스 국가통제위원회(SCC) 요원들이 벨가즈프롬은행의 민스크 지점을 급습해 400만 달러 이상의 현금과 50만 달러 상당의 유가증권을 압수하고 바바리코 등 약 30명을 체포했다. 당시 SCC 위원장이자 현 KGB 국장인 이반 테르텔은 "배후 조종자들(가스프롬의 고위 간부들)이 바바리코의 행동(대선 출마)을 조종했다"고 주장했다. 이에 발끈한 크렘린은 테르텔 국장에게 입증을 요구하기도 했다. 뒤이어 7월에는 벨라루스 중앙선거관리위원회가 바바리코의 대선 후보 등록을 거부했다.
그의 측근 변호사이자 부정선거 규탄 시위 당시 야권 조정위원회 상임위원인 막심 즈나크도 이번에 풀려났다. 그는 콜레스니코바와 함께 비공개 재판에서 10년 형을 선고받았다. 대규모 가두 시위 당시 시위대 간 소통로가 된 메신저(사이트) 'TUT.BY'의 전 편집장인 마리나 졸로토바(12년형 선고)와 일본인 교사 나카니시 마사토시(간첩 혐의로 7년형 선고)도 석방됐다.

석방된 인사 중 비알리아츠키를 비롯한 정치범 9명은 리투아니아로, 콜레스니코바 등 나머지 인사들은 우크라이나로 인도됐다.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벨라루스에 억류된 민간인들을 석방하기 위한 특별 작전이 이번에 펼쳐졌다"며 "그 중 5명이 우크라이나인"이라고 밝혔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이후 "벨라루스인들은 필요한 의료지원을 받은 후 폴란드나 리투아니아로, 희망하는 곳으로 보낼 것"이라고 설명했다.
앞서 벨라루스 대통령실은 텔레그램 성명을 통해 "트럼프 미 대통령과의 합의와 그의 요청에 따라 국가 원수(루카셴코 대통령)는 간첩, 테러, 극단주의 활동 등 각종 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은 123명의 여러 국가 국민을 사면하기로 결정했다"고 발표했다. 또 "이번 사면이 바이든 미 행정부가 벨라루스의 칼륨 산업에 부과한 불법 제재 및 기타 불법 제재의 실질적인 해제로 이뤄졌다"고 밝혔다. 벨라루스는 세계 최대 칼륨 비료 생산국으로, 미국의 제재에도 불구하고 세계 시장 점유율이 20%를 넘는다.
트럼프 대통령은 취임 이후 루카셴코 대통령과 가진 통화에서 1천400명의 정치범을 석방할 것을 요청한 뒤 벨라루스에 대한 제재 해제를 정치범 석방을 위한 카드로 써왔다. 트럼프 대통령의 특명을 받은 대표(특사)가 올해 최소 6차례나 벨라루스를 방문했고, 루카셴코 대통령은 수감자들에 대한 사면·석방으로 호응했다. 그 결과, 9월 말까지 187명이 석방됐고, 워싱턴은 벨라루스 최대 항공사인 벨라비아에 대한 제재를 해제했다.
비알리아츠키는 석방된 뒤 벨라루스 야권 매체와 인터뷰에서 "노벨상은 우리의 활동과 아직 실현되지 않은 열망을 인정한 것이라 생각한다"며 "우리의 투쟁은 계속된다"고 선언했다. 노르웨이 노벨위원회는 그의 석방 소식에 "오랫동안 기다려온 순간이었다"며 "깊은 안도감과 기쁨을 느낀다"고 밝혔다.
렌타루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우크라이나로 간 콜레스니코바 등 석방된 벨라루스 야권 인사들에게 기자들이 러시아 특수군사 작전(우크라이나 전쟁)에 대해 여러차례 질문을 던졌다. 콜레스니코바는 답변을 거부하며 "다른 분이 답변해 주실 수 있나요?"라고 물었고, 이에 바바리코 전 회장이 "잘 알지도 못하는 일이나 한쪽으로만 알고 있는 것에 대해 함부로 언급할 수 없다"며 "전쟁은 언제나 나쁘다"고 피해갔다.
나탈리아 아이즈몬트 벨라루스 대통령 대변인은 사면및 석방 소식을 전한 뒤 "트럼프 대통령과 부인 멜라니아가 특사를 통해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친서를 보내왔다"고 공개했다. 아이즈몬트 대변인은 텔레그램 채널 '브레미야 페르보고'(Время Первого 첫번째 시간이라는 뜻) 통해 "트럼프 대통령 부부는 루카셴코 대통령에게 즐거운 크리스마스가 되기를 기원하며 미국인들에게 베풀어준 선물과 환대에 감사를 표시했다"고 밝혔다.
그녀는 또 "존 콜 특사가 이끄는 미국 대표단은 전날(12일)과 오늘(13일) 루카셴코 대통령과 비공개 회담을 가졌다"며 "양국은 수 시간에 걸친 회담에서 매우 중요한 지정학적 문제와 구체적인 양자 간 실무 문제를 논의했다"고 전한 바 있다.

앞서 루카셴코 대통령은 지난 11월 트럼프 대통령과의 합의에 따라 우크라이나 시민 31명을 사면했고, 이들은 우크라이나로 모두 돌아갔다. 그중에는 '검은 나이팅게일'로 불린 여성, 마리아 미슈크는 18세(체포 당시 16세)였다.
또 지난 6월에는 루카셴코 대통령이 민스크에서 키스 켈로그 미 대통령 특사와 만난 뒤 2020년 대선 후보였던 티하노프스카야의 남편을 포함한 야권 인사 14명을 석방했다.

하지만 티하노프스카야는 남편이 석방된 후 트럼프 대통령에게 루카셴코 (대통령)를 처벌하라고 촉구했다.
러시아 경제 전문 매체 베도모스티에 따르면 벨라루스산 칼륨 (비료)에 대한 미국의 제재 해제로 벨라루스의 칼륨 산업은 정상화의 길로 나아갈 것으로 전망된다.
미국 등 서방의 대(對)벨라루스 제재는 2020년 대선 부정선거 규탄 시위로 비롯됐는데, 벨라루스산 칼륨 비료를 수출하는 벨라루스 칼륨 회사(BPC)가 2021년 8월 미국의 제재 대상에 올랐다. 이듬해(2022년)부터는 수출항인 리투아니아의 클라이페디 항구 사용도 차단됐다. 내륙 국가인 벨라루스는 클라이페다 항구를 통해 '염화칼륨'(칼륨 비료는 염화칼륨과 황산칼륨으로 나뉜다/편집자)의 연간 수출량 1,000만~1,100만 톤을 거의 전부 처리해 왔는데, 항로가 막히자 러시아 항구로 수출로를 돌려야 했다.
하지만 루카셴코 대통령은 지난 5월, 서방의 제재로 인해 벨라루스의 칼륨 비료 수출량이 2022년 450만 톤으로 급감했지만, 3년 후인 2023년에는 제재 이전 수준으로 회복됐다고 주장했다.
미국의 제재 해제에도 불구하고 리투아니아를 비롯한 유럽연합(EU)은 벨라루스산 비료 수출에 대한 제재를 유지할 것으로 전해졌다. EU 측이 민스크(벨라루스의 수도)에 대한 제재 완화를 논의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리투아니아 클라이페다 항구를 벨라루스가 앞으로도 수출항으로 사용하지 못한다는 뜻이다.
하지만 벨라루스 전문가들은 클라이페다 항구의 사용 재개 전망에 낙관적이다. 지역 주민들이 벨라루스산 비료의 선적 중단에 따른 경제적 어려움을 토로하며 당국에 제재 해제를 요구할 것으로 보기 때문이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