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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은 19일 브뤼셀에서 열린 정상회의에서 내년부터 2년간 우크라이나에 총 900억 유로(약 156조원)에 달하는 무이자 대출을 해 주기로 합의했다. 그 방식은 그동안 EU집행위원회와 독일 등 일부 회원국들이 밀어붙였던 러시아 동결 자산을 활용한 '배상금 대출'이 아니라 EU의 예산을 담보로 한 공동 채권 발행이다. EU정상들은 심야 협상 끝에 이같은 EU 직접 대출 방식에 합의했다. 무산된 '배상금 대출'이란 EU 내에 동결된 러시아 자산 2천100억 유로(약 363조원)를 담보로 향후 2년간 우크라이나에 900억 유로(156조원) 규모의 대출을 제공하는 방안이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와 rbc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EU 정상들은 16시간이 넘는 논의 끝에 19일 새벽 2026~2027년 예산에서 900억 유로를 우크라이나에 지원하는 방안을 승인했다. 또 러시아에 대한 제재는 6개월 연장됐다.
논의 과정은 쉽지 않았다. 정상회의로 넘어가기 전부터 배상금 대출의 핵심 키를 쥐고 있는 벨기에의 반대로 실무 회담(EU 회원국 대사 모임)에서 진통을 겪었다. 그런 만큼 그 후유증도 적지 않을 것으로 예상된다.
우선, 배상금 대출 협의 과정에서 불거졌던 친(親)러, 반(反)러 회원국 간의 갈등과 EU 채권 발행에서 채무 부담을 면제받은 친러 국가들(헝가리, 체코, 슬로바키아)에 대한 반감 등이 EU의 결속을 저해하는 불안 요인으로 떠올랐다. 또 논의 막판에 마크롱 프랑스 대통령과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가 배상금 대출에 반대하고 나서면서 EU를 주도하는 독-프랑스-이탈리아 정상들 간의 불화도 향후 EU 체제 운영에 상당한 부담이 될 수 있다.
영국 파이낸셜 타임스(FT)는 21일 "메르츠 독일 총리가 러시아 동결 자산을 우크라이나 지원에 활용하는 방안(배상금 대출)을 적극 추진한 반면, 마크롱 대통령은 침묵을 지켰다"며 "마크롱 대통령은 결과적으로 메르츠 총리를 배신했다"고 썼다. 한 고위 EU 외교관은 FT에 "마크롱 대통령은 배신한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하지만 그는 너무 나약해서 멜로니 이탈리아 총리 뒤에 숨어 있었다"고 말했다.


배상금 대출 저지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멜로니 총리는 19일 정상회의가 끝난 뒤 기자들에게 "상식이 승리했고, 동시에 (우크라이나 지원에) 필요한 재원을 확보하는 데도 성공했다"며 "법적·재정적으로 탄탄한 기반을 갖춘 해법(EU 직접 대출)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기쁘다"고 소감을 밝혔다.
미 정치 전문 매체 폴리티코 유럽판은 바르트 더 베버르 벨기에 총리와 함께 멜로니 총리를 이번 EU 정상회의의 승자로 분류하며 그녀를 '진정한 킹메이커'라고 추켜세웠다. 폴리티코는 "멜로니 총리는 우크라이나 자금 지원 문제에서 개입 시점을 완벽하게 조율하고, 남미와의 무역 협상에서도 큰 역할을 해냈다"고 평가했다. EU 외교관들은 "우크라이나 자금 지원 회의의 전반부에는 거의 발언권을 얻지 않았지만, 합의를 마무리 지은 사람은 멜로니 총리였다"고 말했다. 멜로니 총리는 EU 정상회의를 하루 앞둔 17일 배상금 대출에 반대 입장을 명확히 한 뒤 회의에서 결정적인 시점에 끼어들어 배상금 대출을 포기하고 EU 자체 대출로 논의 흐름을 바꿨다는 것이다.
EU가 배상금 대출을 포기하면서 최대 승자는 처음부터 이 아이디어에 반대한 벨기에라는 평가도 있다. 벨기에 중앙예탁기관 유로클리어는 EU에 묶인 러시아 자산 총 2천100억 유로 가운데 1천850억 유로(약 321조원)를 갖고 있다. 이 때문에 벨기에는 향후 법적 분쟁과 러시아의 보복을 우려해 러시아 자산을 우크라이나에 내어주자는 EU 집행위원회의 설득에도 완강한 거부 입장을 취해왔다. 벨기에의 더 베버르 총리는 회의가 끝난 뒤 "어떤 사람들은 이번 합의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며 "그들은 푸틴 (대통령)에게서 돈(동결 자산)을 빼앗음으로써 벌을 주려고 하지만, 정치는 감정적으로 해서는 안된다"고 말했다.
러시아도 EU 정상회의를 앞두고 유로클리어를 상대로 18조1천700억 루블(약 336조5천억원) 규모의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한 데 이어, 러시아 자산을 보유한 다른 유럽 은행들을 상대로도 손해배상 청구에 나서겠다고 공언한 상태였다.
반면, 반대파 설득에 실패하고 '플랜B' 합의안 도출에 그친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과 안토니우 코스타 EU 정상회의 상임의장은 체면은 구겼으나, 일단 한 숨을 돌렸고, 우크라이나 역시 2026년, 2027년 EU로부터 재정 지원을 기대할 수 있게 됐다.
메르츠 총리는 "합의된 자금이 향후 2년간 우크라이나가 군사 및 일반 재정 수요를 충족하는 데 충분한 수준이 될 것"이라며 "러시아가 우크라이나에 배상금을 지불할 때까지 유럽 내 러시아 자산 동결을 유지하고, 우크라이나가 러시아로부터 배상을 받을 때만 EU로부터 받은 무이자 대출을 상환하면 된다"고 합의 내용을 설명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19일 하루를 정리하는 기획 기사 중 '배상금 대출의 실패' (Провал репарационного кредита)라는 코너에서 "EU 정상들은 어젯밤(정확하게는 현지 시간으로 19일 새벽) 키예프(키이우)에 '배상금 대출'을 제공하자는 안을 거부했다"며 그 의미와 앞으로 예상되는 결과를 5가지로 나눠 이같이 설명했다.
△유럽은 트럼프 미 대통령의 평화 계획(28개 항의 평화안에는 동결 러시아 자산을 전후 복구 사업에 쓰자는 조항이 있다/편집자)을 저지하는 데 실패했다.
△러시아 자산의 사실상 몰수로 초래될 유럽과 러시아 간의 급격한 긴장 고조를 막았다.
△우크라이나에게는 EU의 지원 방안이 '배상금 대출'보다 훨씬 유리하다. 미국의 평화안에서 보듯, 러시아 동결 자산은 전쟁 종식 뒤 국가 복구및 재건 사업으로 돌릴 수 있기 때문이다.
△900억 유로 규모의 유럽 차관(무이자 대출)이 얼마나 순조롭게 진행될지는 두고 봐야 한다.
이에 대해 스트라나.ua는 "EU 예산을 담보로 하는 차관은 사실상 새로운 유로화 발행과 다름없다"며 "코로나19 팬데믹 기간에 발행된 7,500억 유로 규모의 채권은 통화량을 늘려 EU의 인플레이션 압력으로 작용했으며, 그 여파가 아직 완전히 해소되지 않은 상태에서 추가 발행 900억 유로는 경제 상황을 더욱 악화시킬 것"이라고 지적했다. 또 "EU는 앞으로 트럼프 미 대통령의 요구에 따라 국방비를 GDP의 5%까지 늘려야 한다"며 "이를 위해 추가로 통화를 발행한다면, 유럽에게는 막대한 부담이 될 것"으로 내다봤다.
마지막으로 스트라나.ua가 지적한 것은 EU가 자금을 모두 지원하더라도 우크라이나의 내년(2026년)예산 편성 시 기대했던 액수보다 훨씬 적다(2년 900억 유로는 연 450억 유로 꼴이다/편집자)는 사실이다. 우크라이나는 최근 몇 년간 연 1천억 달러 이상의 재정 및 군사 지원을 받은 것으로 알려져 있다. 우크라이나 최고라다(의회) 예산위원회 록솔라나 피들라사 위원장은 최근 "(배상금 대출로 이뤄지는) EU 지원금 900억 유로는 향후 2년간 우크라이나 예산 수요를 충당하는 데 사용하고, 나머지 서방 지원은 무기 생산 및 조달에 사용할 예정"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배상금 대출이 무산되면서 EU 지원금은 내년 예산 적자를 메우는데 그칠 수준이다. "그렇다면 무기 조달 프로그램은 어떻게 운영할 것인가"라고 스트라나.ua는 반문했다.
EU 정상회의에 참석한 젤렌스키 대통령은 "EU의 지원 자금을 확보하지 못하면 우크라이나는 입지가 더 약해진다"며 "우리가 무기를 살 돈이 부족해질수록 푸틴 (대통령)이 우크라이나를 장악하려는 유혹은 더 커질 것"이라고 EU를 압박했다. 우크라이나는 EU의 지원금을 받지 못하면, 내년 2분기에는 국가 부도에 몰릴 것으로 예상됐다.
합의 소식을 전해들은 젤렌스키 대통령은 소셜미디어(SNS)를 통해 "우리의 회복력을 크게 강화하는 의미있는 지원안"이라며 "러시아 자산이 계속 동결되고, 우크라이나가 향후 몇 년간 재정적 안전 보장을 받았다는 사실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