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20일 세상을 떠난 필라레트 키예프(키이우) 총대주교청 우크라이나 정교회(UOC-KP) 수장(혹은 우크라이나 정교회·OCU 명예 총대주교, 이하 존칭 생략)의 유해가 22일 '미하일 황금 돔 대성당'(일각에서는 미카엘 황금 돔 대성당)에서 '세인트(성)소피아 광장'을 거쳐 '성 블라디미르(볼로디미르) 대성당'으로 운구됐다. 그는 이날 성 블라디미르 대성당에 안장됐다.

그의 장례식 과정도 97년 간의 길고 굴곡진 인생 역정을 닮았다. 2018년 12월 러시아 정교회에서 완전히 독립한 우크라이나 정교회(OCU: Orthodox Church of Ukraine, 러시아어로는 Православна церковьа Укражни, 우크라이나어로는 Славійшацера Украѕни)가 본당으로 쓰는 '미하일 황금 돔 대성당'(러시아어로는 Михайловский Златоверхий собор 미하일 황금 돔 대성당, 이하 미하일 대성당)에서 키예프총대주교청 산하 우크라이나 정교회(UOC-KP, 러시아어로는 Украинская православная церковь Киевского патриархата 우크라이나어로는 КиЂвський патріархат, 종교적 법적으로 인정받지 못한 정교회 교단/편집자)의 성 블라디미르 대성당으로 필라레트의 유해가 옮겨진 이유도, 그가 한평생 도전해온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독립 및 통합 여정과 맞닿아 있다.
우크라이나에서 다수가 믿고 있는 정교회는 현재 3개 교단(혹은 종단)으로 쪼개져 있다. 필라레트가 봉직한 키예프총대주교청(UOC-KP)과 OCU, 그리고 모스크바총대주교청 산하 우크라이나 정교회(UOC 혹은 UOC-MP, Ukrainian Orthodox Church, 러시아어로는 Украинская православная церковь Московского патриархата, 우크라이나어로는 Українська православна церква Московського патріархату)다. 필라레트는 당초 모스크바총대주교청(UOC-MP)에서 독립한 키예프총대주교청 산하 우크라이나 정교회(UOC-KP)를 결성했으나, 더욱 급진적인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세력에 의해 OCU가 설립되고, 정치 권력의 도움을 받아 튀르키예(터키) 이스탄불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세계총대주교청,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자 OCU와 관계를 끊었다. OCU도 그를 내치고 싶었으나, 그럴 수는 없었다. 우크라이나 독립 이전부터 정교회 내에서 갖고 있던 그의 영향력을 무시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마지 못해 그를 OCU의 명예총대주교로 추대하고, 키예프총대주교청과 성 블라디미르 대성당을 평생 사용할 수 있도록 했다. 하지만 그는 지난해(2025년) 작성한 유언장에서 자신은 OCU의 명예총대주교가 아니라 키예프총대주교청(UOC-KP)의 종신 선출직 수장이라고 선언했다.
그의 장례식이 정교회 내 갈등에 휩싸인 것은, 그가 유언장에서 자신의 장례 미사를 OCU 소속 신부에게 맡기지 말 것을 당부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OCU 측은 일찌감치 그의 유해를 성미하일 황금 돔 성당으로 모셔갔고, 젤렌스키 대통령 부부 등이 참석한 가운데, 21일 (그가 원하지 않았던) 장례 미사를 지냈다. 그리고 안장하도록 성 블라디미르 대성당에 유해를 인도했다.
OCU의 이같은 행동에 반발한 키예프총대주교청(UOC-KP)은 OCU가 필라레트 총대주교의 유해를 훔쳐갔다고 비난하고, 그의 뒤를 잇는 신임 총대주교로 수미의 니코딤 대주교를 선임했다. 그의 장례식을 계기로 OCU와 키예프총대주교청과의 화해는 더욱 멀어진 느낌이다.

지금까지 우크라이나의 '종교전쟁'(정확하게는 정교회 전쟁)이라면, 2019년 OCU에 독립및 자치권이 부여되기 전에 우크라이나에서 유일한 정통 정교회로 군림해온 UOC에 속한 종교 유물(성물)과 재산, 권위 등을 빼앗으려는 OCU와의 다툼으로만 인식돼 왔다. 특히 UOC가 러시아의 특수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 개시 이후 모스크바총대주교청과의 관계를 공개적으로 단절하고, 키릴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의 전쟁 지지 입장에 동의하지 않는다고 발표(2022년 5월)했으나, 우크라이나의 정치 권력은 여전히 만족하지 못했다. 우크라이나 당국은 전쟁을 계기로 OCU와 결탁해 UOC의 종교적 권위를 박탈하고 종교와 정신적 차원에서 '러시아의 흔적' 지우기에 더욱 열을 올렸다. 이같은 움직임은 미국 등 서방에서 '종교 탄압'이라는 비판을 부르기도 했다.
UOC는 우크라이나에서 가장 유명한 키예프-페체르스크 라브라 수도원을 여전히 본거지로 삼고 있다. 수장은 2014년 키예프-페체르스크 라브라의 성모 승천 대성당에서 즉위한 오누프리 총대주교다. 반면 2019년 2월 성 소피아 대성당에서 즉위한 에피파니우스 총대주교가 수장을 맡은 OCU의 본당은 미하일 황금 돔 대성당이다. 키예프총대주교청(UOC-KP)의 본거지는 필라레트가 수십년간 머물렀던 성 블라디미르 대성당이다.

UOC와 키예프총대주교청도 서로 앙숙 관계다. UOC는 스스로를 (우크라이나 내) 고대 키예프 대교구와 (소련 시절의) 러시아 정교회 산하 우크라이나 총대주교구의 법적 계승자로 여긴다. 여기에 도전한 이가 바로 필라레트였다. UOC의 본거지인 키예프-페체르스크 라브라 수도원의 원장인 파블로 대주교는 2023년 1월 정교회 크리스마스를 맞아 "우크라이나 당국이 정교회를 조직적으로 박해하고 있다"며 키예프총대주교청 소속 우크라이나 정교회 수장인 필라레트 대주교를 '살아있는 악마'라고 불렀다. 이에 우크라이나 민족주의자들이 발끈해 파블로 대주교를 '종교적 신념에 근거한 시민의 평등권을 침해했다'는 이유로 형사 고발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필라레트는 우크라이나가 구소련의 일부이던 1929년 (현재 우크라이나 전쟁의 격전지인) 도네츠크에서 태어났다. 그는 제2차 세계대전 도중 부친을 잃고 종교에 귀의하기로 결심한 것으로 알려졌다. 1950년 ‘필라레트’라는 이름을 받고 30대 초반의 젊은 나이에 주교 서품을 받는 등 러시아 정교회에서 출세의 길을 달렸다. 키예프 교구장을 역임하는 등 러시아 정교회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성직자 중 한 명으로 우뚝 섰다. 구소련의 붕괴 직전인 1990년에는 모스크바 총대주교직에 도전했다. 그러나 알렉시 2세에게 패했다.
소련 해체되자, 그는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독립을 주창하며 1992년 키예프총대주교청 산하 우크라이나 정교회(UOC-KP) 창설을 주도했고, 1995년에는 총대주교 자리에 앉았다. 러시아 정교회는 그의 행동을 배신으로 규정하고 성직을 박탈했다. 필라레트는 이후 러시아 정교회의 지도부와 심각한 갈등을 빚었고, 그가 이끌었던 키예프총대주교청 산하 우크라이나 정교회(UOC-KP)도 기존의 모스크바총대주교청 산하 우크라이나 정교회(UOC, 혹은 UOC-MP)와 계속 충돌했다. UOC-KP와 UOC-MP로 갈라진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분열과 이중 권력은 약 20년간 지속됐다.
판이 바뀐 것은 2014년 러시아가 전격적으로 크림반도를 병합하면서부터. 우크라이나 정교회 내부에선 ‘러시아 정교회와의 관계를 완전히 끊어야 한다’는 목소리가 커졌고, 민족주의 세력 중심의 새로운 우크라이나 정교회인 OCU가 출범했다. OCU는 필라레트가 만든 UOC-KP의 기본 틀 위에서 시작했지만, 주도 세력들은 당시 페트로 포로셴코 대통령과 함께 모스크바총대주교청 산하 우크라이나 정교회(UOC-MP)의 고위 성직자들을 끌어들이기를 원했다. 그래서 UOC-MP의 고위 성직자들과 갈등을 겪는 필라레트를 2선으로 후퇴시키는 수밖에 없었다. 에피파니우스를 수장으로 옹립하고, 필라레트를 실질적인 권한이 없이 명예 총대주교로 추대했다. 필라레트는 당연히(?) 이를 거부했다.
하지만 OCU가 2018년 이스탄불의 콘스탄티노플 총대주교청(세계총대주교청, 총대주교 바르톨로메오)로부터 독립을 인정받으면서, 두 고위 성직자간의 경쟁은 승패가 분명해졌다.
이듬해(2019년) 필라레트는 에피파니우스 총대주교가 내부 통치 협약을 위반했다고 비난하며 키예프총대주교청의 복원을 추진했다. OCU와의 갈등은 더욱 심해졌고, 필라레트의 OCU 비판이 위험 수위를 넘자, OCU는 그에게 제재를 가하는 한편, 그가 임명한 주교들의 성직을 박탈했다. 필라레트가 지난해(2025년) 10월 작성한 그의 유언장에서 OCU 사제들이 자신의 장례 미사를 집전하는 것조차 금지한 이유이기도 하다.
그는 유언장에서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모든 분파(교단)의 주교들과 신도들에게 "서로의 차이점을 잊고 하나의 자치 교회로 통합하고, 키예프에서 통합 공의회를 개최할 것"을 촉구했다. 이때 그의 나이는 이미 96세. 그가 평생을 꿈꿔온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독립및 통합을 이루기에는 너무 늦었다. 더욱이 그의 죽음이후 OCU와 UOC-MP, UOC-KP 간의 통합은 더욱 멀어졌다.
이진희 기자 jhman4u@buyrussia21.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