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May 2026

고려인 이야기 2- 러시아 대중 스타 아니타 최, 그녀는 누구인가

조회수

4864

게시일

2014-07-30

국가

러시아

 

고려인 이주 150주년을 맞은 가운데 한국인들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고려인 대중 스타 아니타 최에 대해 소개해보고자 한다. 구소련 대중 영웅인 '빅토르 최'에 비해 아니타 최는 우리에게 낯선 인물이다. 한국 매스컴을 통해 소개된 바가 있지만, 한국계 러시아 연예인이라는 사실 외에 그녀에 대한 알려진 정보는 거의 없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러시아 방문 중 한국문화관광 특별대사로 활동했다는 것 또한 아는 사람은 극히 드물다.

언젠가 대로변에서 한국계 러시아인 여자가수의 대형 브로마이드를 본적이 있다. 한국에서 이름만 들었던 '아니타 최'. 그녀가 인터넷 방송을 개설했다는 내용이 담긴 대형 광고판이었다. 고려인 3세로, 정치가 남편(역시 고려인)을 둔 그녀는 러시아 방송계에서 종행무진하는 러시아 연예인이다. 얼마 전 가수 싸이의 ‘강남 스타일’을 선보이며 재러 한인으로서, 재러 한인이면서 러시아를 대표하는 대중가수라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시 한 번 과시하기도 했다.

그녀는 1991년 김일성 북한 국방위원장 생전 당시 북한 '통일노래축제'에 출전해 1위를 차지한 경력을 갖고 있기도 하다. (그러나 같은 해 그녀는 찢어진 치마에 김일성 위원장 배지를 달았다는 이유로 북한 외교 블랙리스트에 올랐다.) 이후 그녀는 블랙리스트에 올라 방북 하지 못한다. 2004년 노무현 대통령 러시아 방문 시 '한국문화관광 특별대사'로 임명되기도 했다. 2012년 모스크바에서 열렸던 K-Pop 축제에 참가해 한국 공영방송 기자에게 인터뷰를 자청하기도 했다. 그녀는 ‘아니타 최’란 이름으로 1997년 공식적인 가수 활동을 시작했다. 대중가요는 물론 로큰롤을 비롯해, R&B 등 다양한 음악장르를 선보였다. 싱어송라이터로서 장르를 넘나드는 음악적 재능을 과감 없이 발휘하며 러시아를 대표하는 각종 콘서트 출연은 물론 TV 방송계 진행자로서도 왕성한 활동을 펼치고 있다.

그녀의 할아버지인 윤상흠 씨는 스탈린의 고려인 강제 이주 정책에 의해 중앙아시아로 옮겨졌다. 그녀의 할아버지는 1937년 우즈베키스탄으로 이주해 고려인 집단농장 의원장을 역임한 것으로 알려졌다. 그의 넷째 아들인 아니타 최의 아버지는 그녀가 2살 되던 해 집을 나갔다. 그녀는 홀어머니 밑에서 자랐다. 아니타 어머니(윤 엘로이자)는 1944년 생으로 타쉬켄트 출신이다. 어머니는 모스크바 국립대를 졸업한 촉망받는 젊은 화학도였다.

그녀의 어머니는 자신의 딸에게 '아니타'라는 이름을 지어줬다. 문학을 유독 사랑한 그녀는 프랑스 작가 로맹 롤랑의 작품 '매력적인 영혼'의 여주인공 ‘아니타’에 대한 동경과 갈망에 따라 딸에게 동명 이름을 지어줬다.
아니타 최가 러시아 최고 가수가 되는 데 있어 가장 큰 공헌을 한 사람은 그녀의 어머니다. 아니타 최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한 어머니는 그녀에게 바이올린을 비롯해 피아노, 플룻, 기타 등의 악기를 가르쳤다.

아니타는 <쿠지민스크 55호 특수학교>에서 수학했다. 러시아 국민가수 알라 푸가초바('백만송이 장미'를 부른 러시아 여가수)의 딸(역시 가수 크리스티나 오르바카이타)과 같은 반에서 공부했다. 3학년 때 개, 고양이, 장남감 등을 소재로 노래를 만들기 시작했으며 선생님들을 소재로 패러디 형식의 곡 등을 작사, 작곡했다고 전해진다.

바이올린을 전공했던 그녀가 악기를 그만둔 건 인종에 대한 편견을 가진 음악 선생님 때문이었다. 그녀의 음악 담당 교사는 그녀가 동양인이라는 이유로 그녀를 차별했다. 그래서인지 그녀는 학창 시절에 대한 좋은 추억이 별로 없다.

그녀의 음악 인생은 1986년부터 시작된다. 1990년 국립연극예술학교 성악과에 입학하고 데뷔앨범을 제작했다. 당시 아니타 최는 세르게이 페틀비치 최(정치인 겸 사업가)와의 결혼에 성공한다. 그녀는 남편에게 무대에 설 수 있게 도와달라고 부탁하지만, 공사 구분이 확실한 남편은 이를 외면한다. 재미있는 건, 그녀가 자신의 음악 활동 자금으로 마련한 3000달러의 내막이다. 아니타 최는 자신은 한국 사람이며, 할아버지의 고향인 한국에 가보고 싶다고 남편에게 부탁했고, 여행경비 명목으로 남편에게 받은 돈으로 사업을 시작한다.

잡상인 활동을 하며 3년 동안 아니타는 40,000달러를 모은다. 그 재원으로 아니타는 러시아 음반 제작사인 '소유주'와 계약을 체결하고 자신의 첫 번째 앨범 제작에 나선다. 그녀의 재능을 알아본 프로듀서에 의해 방송 출연이 결정되고 그녀가 처음으로 출연한 음악 프로그램에서 '아니타'는 뮤지션으로서의 자신을 존재를 대중들에게 알린다.

3년간 그녀는 방송은 물론 라이브 무대를 통해 자신의 입지를 굳혀나간다. 당시 음악 활동과 관련한 수입의 대부분은 엔터테이먼트사인 '소유즈'가 챙겼다. 계약의 부당성을 호소하던 중 남편의 재력으로 그녀는 마음껏 음악 활동을 할 수 있게 된다. 이후 1년간 아니타는 12곡의 자작곡을 발표했으며 그 중 90%는 남편에 대한 사랑을 담은 노래다.

아니타 최가 대중에게 알려진 것은 1990년대 말이다. 그녀의 첫 싱글앨범 <비행>에 수록된 '어머니'는 러시아 대중들로부터 큰 반향을 불러일으킨다. 이 음악으로 아니타는 러시아에서 최고의 인기를 차지하는 대중 가수에게 수여하는 <오바치야> 상을 받으며 러시아 대중 가수로서의 입지를 다진다.  1997년 첫 솔로 음반 <비행>이후 1998년 두 번째 앨범인 <검은 백조>를 발매한 그녀는 1999년 개인 콘서트를 통해 알라 푸가초바에 버금가는 대중 스타로서의 입지를 굳힌다. 같은 시기 그녀는 미국에서 자신의 무대를 선보이며 러시아는 물론 세계적인 가수가 되긴 위한 기틀을 마련한다.

그렇지만 러시아와 미국 간 갈등은 그녀의 미국 진출을 막는다. 그녀는 러시아로 돌아온 후 우스베키스탄, 카자흐스탄 등 전 소비에트 국가 순회공연을 하며 유라시아 음악 시장을 타깃으로 삼는다. 그녀는 이러한 왕성한 활동과 더불어 공익재단을 설립하며 선행 활동에도 적극 나선다. 2000년대 초반 한해 동안 그녀가 도운 아동 수(장애인으로 태어난 아동)가 35,000여 명에 이르며 2009년도에는 ‘생명은 계속 된다’라는 슬로건 아래 콘서트 투어를 하며 수입은 전부 재단에 기부한다. 이때 그녀가 발표한 ‘만인을 위한 노래’는 러시아 대중 가수 블라디미르 비쏘츠키에 이어 두 번째로 유명한 노래가 됐다. 2010년 그녀는 ‘Universal Music’ 음반회사와 공동으로 '양심을 건 쇼-비즈니스' 프로그램을 발족해 앨범판매로 벌어들인 전 수입을 고아원에 기증하기도 했다.

사업가로서 활동을 시작한 것은 음악 활동 전부터다. 그녀는 한국과 러시아 간 소규모 소매 중계 상인 노릇을 하며 얻은 수익을 통해 앨범을 제작했다. 이후 네트워크 마케팅에 뛰어들면서 비타민 생산업체인 '엔젤'사의 주주로서 직접 사업에 관여하기도 했다. 2010년에는 자신의 생일인 2월 7일 '동양의학센터'를 열기도 했다.

러시아 대중 가수에서 사업가로 변모한 ‘아니타 최’에 대한 한국인의 관심은 증가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녀는 러시아 대중 문화계의 한복판에서 활동하는 재러 한인이며, 카레이스키(고려인)로서의 정체성을 지키기 위해 노력하는 몇 안 되는 러시아 문화 인사 가운데  한명이기 때문이다. 한국 가수 인순이를 좋아한다는 그녀는 러시아에서 부는 ‘한류’의 조력자가 될 것이 분명하다.

 

※사진출처: http://yandex.ru/images/  인덱스

댓글을 남기려면 로그인해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