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 Jan 2026

‘저주받은 그림’ 은 어떻게 만들어지나: 러시아 미술의 ‘불운 서사’ 읽기

“화가의 붓을 두려워하라. 그가 그린 초상화가 모델보다 더 생생하게 살아 숨쉴 수 있다.”
이 문장처럼, 어떤 그림은 작품 자체의 완성도와 별개로 ‘불운’이라는 꼬리표를 달고 살아남는다. 러시아 미술사에서 이런 서사가 유독 강하게 작동해 온 이유는 단순하다. 격동의 역사(혁명‧암살‧검열), 거대한 관객층, 그리고 작품을 둘러싼 실제 사건(훼손‧병‧죽음)이 결합하면, 사람들은 그 사이를 ‘저주’라는 언어로 이어 붙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여기서 반드시 구분해야 할 것이 있다. 첫째, 기록으로 확인되는 사건(팩트). 둘째, 소문과 전설(민속‧도시괴담). 아래의 이야기들은 이 둘을 분리해 읽을 때 가장 흥미롭다.

'일리야 레핀' 《이반 뇌제와 아들 이반》(1883–1885)

1) ‘일리야 레핀’, ‘그림이 현실을 찢는 순간’ ― 《이반 뇌제와 아들 이반》(1883‧1885)

러시아에서 “불운한 그림”의 대표 격은 ‘일리야 레핀’의 《이반 뇌제와 아들 이반》(1883‧1885)이다. 작품 자체가 이미 잔혹한 역사 장면을 다루고 있는데, 여기에 현실의 폭력이 실제로 그림을 두 번 찢었다는 사실이 겹치며 ‘저주’ 서사가 폭발했다. 1913년 1월 16일, 관람객이 칼로 그림을 세 차례 훼손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 매체들은 이 사건과 이후의 파장을 상세히 전한다.
2018년 5월 25일, 또 다른 남성이 금속 기둥으로 보호 유리를 깨고 캔버스를 찢는 사건이 발생했다. 러시아 통신과 해외 매체가 구체적 피해 상황을 보도했다. 이 작품은 원래도 논쟁적이었다. 1885년 공개 직후 황제 측이 불쾌감을 드러내며 전시 제한이 있었고, 시간이 흐른 뒤에도 “너무 자극적이다‧역사를 왜곡한다”는 공방이 반복됐다. 즉, 이 그림에 붙은 ‘불운’의 핵심은 초자연이라기보다, 정치‧도덕‧역사 해석이 충돌하는 지점에서 작품이 표적이 됐다는 점에 있다.

지금 어디서 보나: ‘모스크바’ ‘국립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소장. 복원‧보호 조치 관련 보도도 이어졌다.

'미하일 브루벨' 《추락한 악마》(1901–1902)

2) “그는 악마가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그렸다” ― ‘미하일 브루벨’ 《추락한 악마》(1901‧1902)

‘미하일 브루벨’의 《추락한 악마》(1901‧1902)는 소재 자체가 “불길하다”는 평가를 불러오기 쉬운 작품이다. 그런데 이 그림이 ‘불운’으로 회자되는 더 큰 이유는, 작가의 심리‧육체적 붕괴 서사가 작품 감상과 강하게 결합했기 때문이다. 특히 유명한 일화가 있다. 1902년 전시 기간, ‘브루벨’이 관람객이 적은 시간대를 골라 그림 앞에서 반복적으로 덧칠하고 수정했다는 전언이다. 이 이야기는 작품 설명과 연구 글에서 반복된다. 이 지점에서 ‘저주’ 서사는 이렇게 변주된다. “악마를 그리다가 영혼을 갉아먹혔다” 같은 초자연적 문장으로. 하지만 미술사적으로 더 설득력 있는 독법은 반대다. ‘브루벨’이 집착적으로 밀어붙인 형식 실험과 강박이 그의 병적 증상과 동시에 진행됐고, 관객은 그 동시성을 ‘저주’라는 말로 번역해버렸다는 것이다. 전설의 언어로 예술의 비극을 이해하려는 방식이라고도 할 수 있다.

지금 어디서 보나: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이 대표 소장처로 알려져 있다.

'이반 크람스코이' 《미지의 여인》(1883)

3) “그 여자는 누구인가”보다 더 오래 간 질문 ― ‘이반 크람스코이’ 《미지의 여인》(1883)

‘이반 크람스코이’의 《미지의 여인》(1883)은 “저주”보다 먼저 “정체”가 이야기의 엔진이었다. 귀족인가, 화류계 인물인가, 부유한 상인의 정부인가. 수많은 해석이 붙었고, 정답이 없다는 사실 자체가 작품을 신화화했다. 그리고 그 신화 위에 “소유자가 불행해졌다”는 류의 서사가 덧씌워졌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 부분은 대개 확인 가능한 연표라기보다 ‘돌아다니는 이야기’에 가깝다는 점이다. 다만 “트레티야코프에 늦게 들어왔다”는 사실 자체는 여러 자료에서 공통적으로 언급된다. 1925년 ‘트레티야코프’ 컬렉션에 편입됐다는 기록이 보인다. 이후 “이상한 사건이 잦아들었다”는 식의 결말이 따라붙는데, 이건 전형적인 전설의 구조다. “제자리, 즉 국립 미술관으로 돌아오자 저주가 끝났다”는 식으로 정리되는 것이다.

지금 어디서 보나: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블라디미르 보로비콥스키' 《마리야 로푸히나의 초상》(1797)

4) 결혼을 앞둔 집에 두지 마라? ― ‘블라디미르 보로비콥스키’ 《마리야 로푸히나의 초상》(1797)

‘블라디미르 보로비콥스키’의 《마리야 로푸히나의 초상》(1797)은 러시아 초상화의 ‘전형적 아름다움’을 보여주는 작품으로 꼽히지만, 동시에 “혼인을 앞둔 처녀에게 위험하다”는 식의 소문이 따라다닌다. 여기서 팩트의 뼈대는 비교적 단순하다. 작품은 1797년 제작으로 알려져 있고, ‘트레티야코프’ 측 카탈로그에도 등재돼 있다. ‘로푸히나’가 요절했고(일반적으로 결핵설이 유명), 그 비극이 초상화에 투사되면서 ‘혼령이 깃들었다’ 같은 문장이 따라붙었다. 이 부분은 대개 19세기 러시아 특유의 신비주의‧사교적 소문 문화와 함께 소비된다. 즉, 이 그림의 ‘불운’은 사건(훼손‧폭력)보다, 당대의 상상력이 만든 사회적 이미지에 가깝다.

지금 어디서 보나: ‘모스크바’ ‘트레티야코프 미술관’. 카탈로그 등재 작품이다. ‘저주’ 대신 ‘장치’를 보라: 불운한 그림이 오래 살아남는 법. 러시아의 “불운한 그림들”은 대체로 세 가지 장치를 갖는다. 첫째, 극단적 시대 배경. 혁명‧암살‧검열‧전쟁이 ‘우연’의 밀도를 높인다. 둘째, 작품 주제 자체의 강한 자극성. 폭력, 악마, 신비한 여성 같은 소재는 해석의 불안을 키운다. 셋째, 실제 사건이 한 번이라도 붙는 순간 전설은 자동으로 생성된다. ‘레핀’의 사례가 결정적이다. 그래서 이 장르의 재미는 “정말 저주인가?”에만 있지 않다. 한 나라의 불안과 욕망이 예술을 통해 어떻게 이야기로 굳어지는가를 보는 데 있다. 러시아 미술이 어렵게 느껴지는 독자라면, 이 네 작품을 “초자연”이 아니라 “서사를 만들어내는 장치”로 읽어보는 것만으로도 입구가 크게 열린다.

최승현 에디터 buyrussia21@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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